2002-48. 기다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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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67-79
설교일시 200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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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시간
눅1:67-79
(2002/12/1)


초록 재와 다홍 재

新婦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郞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新郞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新郞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新婦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찍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四十年인가 五十年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新婦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新婦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서정주 시인의『질마재 神話』에 나오는 <新婦>라는 시의 내용입니다. 저는 기다림의 절기가 시작되는 이즈음이 되면 늘 이 시가 떠오릅니다. 수 십 년을 앉은 자세 그대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정한,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신랑이 안쓰러움에 신부의 어깨를 보듬는 순간 마치 오랜 서러움이 풀린 듯 폭삭 재로 내려앉고 마는 그 소멸, 저는 이 시를 본 순간부터 초록과 다홍이 곱게 어울린 한복을 볼 때마다 여성들이 겪어왔던 아픔과 서러움의 역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인생은 기다림

인생은 온통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림은 '기다림의 내용'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기다림의 시간들이 빚어낸 다양한 무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 힘겨운 것은 아직 기다림의 내용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삶이 아름다운 것은 아직도 뭔가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방학을 기다리고, 연인들은 첫 눈을 기다립니다. 엇나가던 자식들이 정신 차리고 새 사람되기를 기다리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공들여 키운 나무가 꽃을 피우기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인들은 불멸의 순간으로부터의 한 소식을 기다립니다. 직장을 구하는 이들은 언제부터 출근하라는 소식을 기다립니다. 외로운 노인들은 자식들의 안부 편지나 전화를 기다립니다. 강자들의 횡포에 가슴에 피멍울이 맺힌 사람들은 평화로운 세상을 기다립니다. 미가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 땅의 역사를 심판하시는 날을 이렇게 그립니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미4:3-4a)


여기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기쁨의 날을 맞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가랴입니다. 그는 아비야 반열에 속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엘리사벳도 아론 가문의 후예였습니다. 경건하고 소박한 그 가정에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습니다. 아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은 부부 중 누군가가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들은 남모를 근심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가랴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당시에는 제사장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속해있는 제사장 그룹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 일년에 두 번씩만 직무를 수행하면 됐습니다. 성전 봉사의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는 기도 시간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단 위에 향을 사르고,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직무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비를 뽑아 결정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택으로 받아들였고, 또 특별한 은총을 받을 기회로 여겼습니다. 다른 제사장들은 지성소 바깥에 머무르면서 역시 기도를 드렸는데, 그들은 지성소에 들어간 선택받은 제사장을 통해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복음사가 누가는 사가랴가 그 놀라운 은총의 기회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간 사가랴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선 자기를 택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백성의 구속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자기 가문이 끊기지 않도록 아들을 주십사고 기도했을 겁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분향단 오른편에 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시려고 작정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는 아이의 이름까지 알려주었습니다. '요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는 이유도 알려주었습니다. 아이는 성령에 충만해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될 텐데,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불가능의 가능성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듣고 사가랴는 두려움도 잊은 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도 늙었고 아내도 늙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이율배반적입니다. 하나님께 자식을 구할 때는 언제이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또 뭐랍니까. 천사는 자기의 이름을 밝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는 나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메시지 실명제인 셈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약속이 성취되는 때까지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가랴가 지성소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가자 제사장들은 초조한 기색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성소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그들은 사가랴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가랴는 자기가 경험한 놀라운 체험을 아무에게도 전할 수 없었습니다. 직무의 날이 다 지나 집으로 돌아간 얼마 후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마침내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냈다고 전합니다. 때가 되자 엘리사벳은 건강한 사내 아기를 낳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아기의 탄생을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친척들과 지역의 악사들이 집 가까이에 몰려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아기가 태어남을 경축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팔 일이 되었을 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이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명실상부한 유대인으로 다시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아기는 이름을 받습니다. 대개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이름을 따서 아기의 이름을 짓곤 했습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엘리사벳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선언하듯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낯선 이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견해를 듣고 결정하자고 합니다. 사가랴는 서판에다가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또렷이 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그가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의 불신은 치료되었습니다. 그러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사가랴는 마치 속에서 소리가 분출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찬가를 부릅니다.


사가랴의 노래

사가랴의 노래는 하나님이 그의 조상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또 백성에게 주셨던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셔서, 그들을 원수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분을 세워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비록 로마의 압제 아래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주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값비싼 대가를 대신 치르시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사가랴는 자기 아들 요한이 메시야의 오실 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자로 이 세상에 왔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역사의 제단 앞에 아들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새벽의 전령으로 보냄을 받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가랴는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요한은 주님 오실 길을 닦는 사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책임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성도란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쳐야 합니다. 몇 해 전 우리는 '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라는 교회의 목표를 정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선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파괴적인 삶의 스타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원하십니다. 주님의 구원의지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어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리듬에 따라 살아갑니다. 세상이 내가 뜻한 바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조급해 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더디지 않습니다.


삶을 조율하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치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즉각 물건을 내놓는 자동판매기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절박한 기도에 대해서도 때때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다급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무정한 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다리라는 명령에는 분명히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 속에서 우리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율하라는 것입니다. 연주자들이 연주하기에 앞서 'tuning'을 하는 것처럼,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의 계획과 삶의 속도를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어 조율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선물, 그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보다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간절함이 있다면 우리는 사가랴처럼 기쁜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영혼 깊은 곳에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주님의 용서하심을 마음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마음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셋째, 마음에 절망감이 깃들 때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절기인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속을 기다렸던 사가랴처럼 주님이 오실 길을 닦아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대강절기에 우리 모두의 마음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