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4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설교자
본문 요1:14-18
설교일시 2002/12/8
오디오파일
목록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18
(2002/12/8)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

요즘은 책이 흔해서 소중한 줄 모르지만 옛날에는 참 구하기 어려운 보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책을 빌려와서 그것을 한 글자 한 글자 베껴서 필사본을 만들었답니다. 경전이든 소설이든 여러 날에 걸쳐 꼬박 베껴 쓰고 나서 맨 마지막에 붓을 놓을 때 솟구치는 감회가 없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책의 말미에는 으레 필사자의 감회를 몇 줄 적어둔 필사기(筆寫記)가 붙어 있습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병오년 2월에 여아(女兒) 조실(趙室)이 제 아우 혼인 때 근행(覲行, 어비이를 뵈오러 가는 여행)하여 「임경업전(林慶業傳)」을 등출(謄出, 베끼다) 차로 시작하였다가 필서(畢書) 못 하고 시댁으로 가기에, 제 아우 시켜 필서하며 제 종남매 제 숙질 글씨 간간히 쓰고 노부(老父)도 아픈 중 간신히 서너 장 등서(謄書)하였으니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


아우의 혼인을 맞이하여 처음 친정으로 어렵게 걸음 한 딸이 집에 있던 소설책을 만지작거리다가 베껴 써서 시댁으로 가져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반도 채 쓰지 못했는데 돌아갈 날이 닥치고 말았어요. 딸을 보내고 방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딸이 베끼다가 두고 간 낱장들을 매만집니다. 그러다가 그것을 마저 적어서 보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몇 장을 써보지만 눈도 침침하고 기력도 부쳐, 작은딸에게 필사를 맡깁니다. 그런데 필체가 조야합니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싶어 급기야 조카딸까지 불러들여 소설을 베끼게 하여 마침내 필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낱장으로 된 그 글들을 모아서 책을 맨 후에 남은 여백에 편지를 대신하여 필사의 경과를 적었습니다.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 뒤늦게 친정에서 보내온 뜻밖의 선물을 받아든 딸의 감회가 어떠했을까요? 그 책은 이미 소설책이 아니라, 그리운 아버지의 마음이고, 보고 싶은 동생과 친정 식구들의 얼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책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딸의 시집살이를 지켜주었을 것입니다.


한 책의 사람

'아비 그리운 때 보아라.' 그 한 마디가 자아내는 울림이 여간 깊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그런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성경책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살이가 힘겨울 때마다, 삶의 방향을 가늠할 길이 없을 때마다 우리가 돌아가 조회해 보아야 할 삶의 지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는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li)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성경 이외의 책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는 독서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있는 길을 따라 하늘에 이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하늘에 이르는 길을 알고 싶습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어떡해야 그 행복의 해안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습니까?
친히 그 길을 가르쳐주시려, 주님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그 길을 한 책 속에 기록하셨습니다.
오, 그 책을 내게 주십시오!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이든 당신의 그 책을 내게 주십시오.

내 삶에 필요한 모든 지혜가 담긴 그 책을 이제 받았습니다.
나로 하여금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li)이 되게 해주십시오.
인간의 모든 소요로부터 멀리 벗어나, 나 여기에 있습니다.
나 홀로 앉아 있는 이곳, 주님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의 현존 안에서, 나는 그 책을 열고, 조용히 읽습니다.
하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기 위하여.


가끔 만사가 그릇되고 슬프게만 보일 때 성경을 열어 보십시오. 그러면 스산했던 마음의 뜨락에 영원의 햇살이 비쳐들 것입니다. 우리는 토막난 시간을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기쁨도 맛보고, 비명도 지릅니다. 하지만 성경을 마주하고 앉는 순간 우리는 영원의 빛에서 인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들도 지나가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슬픔의 시간도 지나갑니다. 지금 오만한 사람도, 오만한 나라도 지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영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


지나가버릴 것들에 집착하기에 우리 삶은 피곤합니다. 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닻을 내린 사람들은 평안합니다. 피었다가 지는 들꽃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사는 사람은 인생무상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 무상함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1-2)


영원의 길을 찾는 사람은 꾀바른 악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을 멀리하고, 미련하고 우직하게 삽니다. 그는 결코 자기를 죄와 욕망의 진창 속으로 내던지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치켜세우지 않습니다. 그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인도를 따라 살기에 그는 자유롭습니다. 당당합니다.


말씀 사건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대개 이 구절에서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는 부분에만 밑줄을 긋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주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면 조건절입니다. 남의 집 창고 앞에서 쌀자루를 벌리고 기다려봐야 소용없습니다. 먼저 주님 안에 우리 거처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십니다.

말씀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내가 방에서 책을 보는 데 아내가 "식사하세요"하고 외치면 나는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울려오면 우리는 뭔가를 하게 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 말씀이 울려오면 우리는 굶주리는 이들을 먹이기 위해 애를 쓰게 됩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는 말씀이 울려오면 우리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의를 길을 걷게 됩니다. 불화와 갈등의 현장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떠오르면 우리는 즉시 불화를 극복할 길을 찾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밀레도 바닷가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리라(행20:32)


그런데 지금 우리는 엘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많은 데,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니 말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우리의 혼을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분주한 살림살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언자 아모스는 이런 현실을 내다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성경을 여러 번 읽은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울려서 뭔가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못하고 남은 말씀은 종종 우리 속에서 축적되어 '교만과 편견'의 독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우리는 말씀이 온전한 육체가 되신 분을 압니다. 예수님이 그분이십니다.


몸이 된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저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렙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이보다 더 명확히 보여주는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육신을 부여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으면 그 밥이 우리의 살도 되고 피도 되어 '나'로 바뀌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꽃씨처럼 우리 속에서 활짝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성육신의 신비를 다른 말로 표현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


누에는 뽕잎을 먹고 비단을 토해냅니다. 소는 풀을 먹고 우유를 만들어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삶을 일치시켜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당신을 맞아줄 몸을 찾고 계십니다. 2000년 전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기를 원하십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하늘로부터 오시는 주님을 받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