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50. 내 마음 도로 내놓아!
설교자
본문 눅3:10-14
설교일시 2002/12/15
오디오파일
목록

내 마음 도로 내놓아!
눅3:10-14
(2002/12/15)


우리가 무엇을 할까요?

주님 맞으실 준비를 잘 하고 계시는지요? 그 준비란 다른 것 아닙니다.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기억을 떨쳐내고, 어두운 열정을 가라앉히고, 어두운 행실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님께서 주신 마음을 다시 되찾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다 팔아먹었고나!
아버지가 집에서 나올 때
채곡채곡 넣어주시며
잃지 말고 닦아내어
님 보거든 드리라
일러주시던 그 마음
이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먹었고나!


님이 오실 날 가까운데, 주님 앞에 이르러 귀한 예물을 바쳤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을 그분께 바쳐야 하는데, 소중한 마음을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사탕에 맘 팔고, 옷에 맘 팔고, 고운 듯 꾀는 눈에 뜨거운 맘 다 팔고, 피리 소리 좋은 듯해 있는 맘 툭 털어주고 사고 보니 다 가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세상을 향해 "님께 바쳐야 할 내 맘을/도로 내놓아, 어서 내놓아!" 하고 외칩니다. 세상에 팔렸던 마음을 거두어들여 아름답게 닦아내어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길을 닦았던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는 과거에 대한 후회, 회오의 감정을 포함하긴 합니다만 거기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悔'에는 '改'가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를 뜻하는 단어 '메타노이아'는 '방향전환'을 뜻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철저히 포기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복음적 회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그에게 찾아와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참 중요한 물음입니다. 우리 속에서 이 물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삶이 새로워질 리가 없습니다. 자기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혹은 삶의 방식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절박하게 자각하는 사람이라야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런 물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님,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겸손한 경청의 자세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믿음이란 우리를 두고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눔을 실천하라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이것은 물론 부유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라는 말씀이겠지요. 나눔이라는 것은 나에게 불필요한 것, 혹은 남는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도 소중한 것이지만 다른 이의 필요에 응답하여 그에게 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는 '그냥 드립니다'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세상에서, 나눔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배우고, 또 거기서 오는 기쁨을 맛보자는 취지에서 만든 코너입니다. 아직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단 그곳에 참여한 이들은 신비한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거저 받은 사람들이 기분 좋은 거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주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영혼이 커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사랑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나눔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부유한 이들만이 아닙니다. 하루는 어떤 남자가 마더 테레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는 한 가정이 있는데, 식구 전부가 며칠 째 굶고 있다는 말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음식을 마련해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과연 아이들은 배고픔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 얼굴에는 슬픔이나 서러움이 아니라 배고픔에서 오는 깊은 고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아이들 어머니에게 쌀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쌀을 반으로 나누어 들고 나갔습니다. 그녀가 돌아오자, 테레사 수녀는 어디에 다녀왔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옆집에 다녀왔어요. 그들도 배가 고프거든요." 저는 이게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배고프고 헐벗은 이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너그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 있는 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인간적 과제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뭔가를 내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은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부패의 사슬을 끊으라

세례자 요한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라고 묻는 세리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부당 이득을 취하지 말라는 말이겠습니다. 저는 이것은 '부패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얻고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 누구나 다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도처에서 검은 돈이 오갑니다. 정경유착이니, 권언유착이니 하는 말들이 어느 때나 되어야 사라질는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원리원칙대로 정직하게 사업을 하면 망할 수밖에 없다고들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조차 그런 검은 거래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꿩 잡는 게 매라고요? 결과가 좋으면 수단은 정당화 될 수 있다고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잘못된 고리를 자르라고 부름받았습니다.

기독교인은 달라야 합니다. 물론 어렵지요. 속으로 '목사님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 하실 분도 있겠습니다. 예, 잘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은 잘 압니다. 주님은 그래서 당신을 따라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 허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왕 앞에 섰습니다. 가난하기로 마음먹으면, 못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생활의 규모를 줄여 보십시오. 좀 덜 먹고, 덜 쓰고 살기로 마음먹으면 영혼의 자유가 찾아옵니다.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지고 나니, 달빛이 뱃전에 가득 차 오더라지 않습니까? 욕심을 버려야 행복이 찾아옵니다.

이세벨을 피해 달아난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서서 했던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이 주님의 예언자들을 다 죽여, 이제 남은 것이라곤 자기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 맞추지도 않은 선지자 칠천 명이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왕상19:14, 18). 하나님의 사람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켜들기 시작한 희망의 촛불이 이제는 거대한 빛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 보고 있습니다. 부패의 사슬을 끊기 위해 우리가 손해를 감수할 때, 하나님은 더 많은 동지들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섬김을 위해 힘을 사용하라

세례자 요한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는 군인들에게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하고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힘을 가진 자들입니다. 힘을 가진 이들이 흔히 빠지는 유혹은 그 힘을 무력한 이들에게 행사하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작가 윤흥길은「완장」이라는 소설에서 조그마한 완장이라도 두르면 사람이 달라져 턱없이 사람들 위에서 거들먹거리려드는 미욱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자기의 사욕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사람, 다른 이들을 주눅들지 않게 하는 사람은 참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주눅들게 하지 않으시려고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비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모든 사람들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성숙의 징표는 힘을 가지고도 그것을 사욕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데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지금 섬기는 이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고 계십니다. 많이 나눌 줄 알되 스스로 비참해지지 않고, 넉넉하지 않지만 깨끗한 손을 가진 사람들,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섬김에 쓸 줄 아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솟아나게 마련입니다. 이 아름다운 대강절기에 우리 모두의 삶에 이런 기쁨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