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51. 가장 큰 선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1:16, 23
설교일시 200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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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선물
마1:16, 23
(2002/12/25, 성탄절)


가장 위대한 신학적 통찰

갈등과 분열의 땅에 평화를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을 감사함으로 영접합니다. 딸에게 "아빠를 위해 성탄절 선물을 준비했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선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길래, 그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눈치 하나는 빠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를 위해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데, 그가 1961년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 초청 교수로 가서 한 한기 동안 강의를 했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그의 마지막 강의가 있던 날 신학대학의 학장은 청중들에게 "바르트 박사가 건강도 여의치 않고 몹시 피곤한 가운데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여러분의 질문을 받고 싶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건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대신 제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한가지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학장은 그 저명한 신학자를 향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얻은 그 수많은 신학적 통찰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미 수십 권의 책을 써낸 노대가에게 주어진 최고의 질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그가 하는 말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받아 적으려고 펜을 잡고 노트를 끌어당겼습니다. 바르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몇 분간 생각에 잠겼습니다. 얼마 후 그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얻은 신학적 통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경이 내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대신학자의 입에서 나온 고백치고는 너무나 소박해서 어쩌면 듣는 이들이 맥이 탁 풀려버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번 성탄절에 칼 바르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선생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얼굴 하나' 만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 얼굴을 만나면 삶이 뜻을 얻고,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얼굴, 언제 보아도 늘 그러한 넉넉한 얼굴, 그 얼굴을 만나야 우리 삶이 덧없는 일에 이리저리 끄달리지 않고, 든든하게 자리잡히게 됩니다. 세상에 잘 생긴 사람은 많지만, 그 속에 생명의 신비와 우주의 깊이를 담고 있는 얼굴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얼굴과 만난 사람들입니다. 온 인류 가운데서 가장 사람다운 사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오롯이 드러내주는 분, '만물이 그분 안(in)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by)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for) 창조된 분'(골1:16),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 태어났니?

사람들은 친구나 가족의 생일을 맞으면 케잌에 불을 붙여놓고 축하노래를 불러줍니다. 그런데 짓궂은 사람들은 ‘생일 축하합니다’의 멜로디에 가사를 바꾸어 부르기도 합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물론 이것은 악의 없는 장난이겠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건 꽤 괜찮은 가사입니다. 해마다 생일을 맞을 때,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저는 제가 왜 태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는 잘 압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8-39)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 아닐까요? 그분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속에 생명의 기쁨을 불어넣는 일일 거예요.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애머리염낭거미(맞나?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가 뱀을 잡아먹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뱀의 몸에다 독을 주입해서 녹여서 먹더군요. 끔찍했어요. 그러면서 우리도 누군가의 영혼에 대롱을 꽂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명과 기쁨과 희망을 주입해서 생명을 살리는 이도 있고, 죽음과 슬픔과 좌절을 주입해 생명을 서서히 죽게 만드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이 사람 대접을 받았고, 세상살이에 지쳐 시든 영혼들이 깨어났습니다.

무엇을 낳으려는가?
우리는 그분을 가리켜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지요. 어머니 마리아와 양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사실 예수님을 낳은 것은 죄와 폭력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인류의 간절한 염원과 그런 염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삶을 통해 무엇인가를 부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백성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라는 말이나, ‘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 행동 하나 하나는 무엇인가를 이 세상에 가져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다소 닮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잘못된 길로 접어들기 쉬운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악인은 악을 잉태하여 재앙과 거짓을 낳는구나(시7:14)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호8:7)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여러분은 무엇을 낳고 계십니까? 평화입니까, 불화입니까? 사랑입니까, 미움입니까? 모자에 손을 넣었다 꺼내는 마술사의 손에는 꽃다발이나 비둘기가 들려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우리의 마음 씀, 혹은 실천이 이처럼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경탄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지배하던 시기를 가리켜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 시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평화의 실체는 로마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약소국가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예수님은 땅의 평화가 아니라, 하늘의 평화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의 드러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도 예수님이 오실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원합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김소월의 시「진달래꽃」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정한의 고향으로 기억되고 있는 영변은 지금 핵재처리시설로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진달래꽃에서 핵까지’, 우리는 가파른 현대사를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이 강토에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테러와 폭력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그분을 우리의 가슴에, 그리고 민족의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두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나라들을 침묵시킴으로 얻어지는 거짓 평화 말고, 섬김과 나눔과 사랑에 바탕을 둔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평화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선물이 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 아름다운 성탄절기에 우리 모두 세상의 선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