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52. 하늘과 땅의 호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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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호2:18-23
설교일시 200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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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호응
호2:18-23
(2002/12/29, 송년주일)


정의가 힘이다

이번 주 주보를 만들면서 2002-52라고 호수를 입력하다가 한 해가 다 갔구나 하는 생각이 아득하게 밀려왔습니다. '잘 살았는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월드컵과 대통령 선거 열기 속에서 한 해가 녹아버리고 만 것 같습니다. 나라 밖에서는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분쟁과 갈등의 그림자는 한반도에도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북한과 미국이 벌이고 있는 이 살벌한 죽기살기 게임의 끝이 무엇일지 우리는 알기 어렵습니다. "대화는 안 한다, 무조건 항복하라"는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는 마치 독재 정권 시절에 고문실에서 벌어진 일들을 연상시킵니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도 매우 위험합니다.

힘이 곧 정의는 아닙니다. 정의만이 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저는 앨버트 노런이라는 분이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권위와 예수님의 권위를 비교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았지만, 예수는 진리를 권위로 삼았다." 진리를 권위로 삼은 사람은 권위를 진리로 삼은 사람들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면만의 진실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한 말을 아주 소중하게 여깁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행3:15)


중요한 것은 '그러나'입니다. 인간의 불의한 역사를 역전시키는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오만에 빠진 권력을 보고 웃으시는 하나님,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심은 것을 뽑기도 하는 하나님(렘45:4b)이 살아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바알에게 팔린 백성

본문은 우리가 어떤 평화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흔히 호세아서는 예언자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를 얻어서 갖은 곤욕을 다 겪는 이야기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언어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은 바알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잘 알 것입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바알 앞에 사람들은 속절없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잘 살게 해준다는 데 싫다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문제는 그 잘 산다는 것의 기준이 '물질적'인 데 치우쳤다는 것입니다. 바알 신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 같지만, 바알 신앙은 소비주의의 이름으로 부활해서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너무 아프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섬기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바알을 예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알 신이 지배하는 세상에 정의란 없습니다. 긍휼도 없습니다. 평화도 없습니다.

호세아는 바알에게 얼이 팔린 고멜과의 사이에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입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린다'는 뜻이고, 로루하마는 '은혜를 받지 못한 자',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좀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로루하마와 로암미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속상함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무력화시킬 수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백성들에 대한 진노를 거두십니다. 호세아의 자식들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루하마'와 '암미'가 그것입니다. 그 이름은 각각 '은혜를 받은 자', '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비극의 땅 이스르엘

그런데 문제는 '이스르엘'입니다. 그 이름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게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스르엘은 갈멜산 자락에 위치한 비옥한 평야지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곳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첫 번째 아이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지정하신 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곧 내가 예후의 집을 심판하겠다. 그가 이스르엘에서 살육한 죄를 물어서 이스라엘 왕조를 없애겠다. 또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평원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겠다."(호1:4b-5)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 여행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픈 생각에서 이세벨이라는 이방 여인과 정략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바알신을 숭배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세벨을 통해 바알 신앙이 이스라엘에서 크게 활력을 얻게 됩니다. 그것을 보고 선지자 엘리야는 떨쳐 일어나, 갈멜산 위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신앙의 일대 결전을 벌이고, 결국 승리합니다. 엘리야는 그곳에서 바알과 아스다롯의 선지가 850명을 죽입니다. 그들의 피가 흘러 이스르엘 평원을 적셨습니다. 그 사실을 보고 받은 이세벨은 이를 갈면서 엘리야를 꼭 죽이고야 말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으로 도망가고, 고독 속에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세미한 가운데 들려오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잘못된 역사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아합을 폐하고 예후를 새로운 지도자로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예후가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는 것은 소위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이스르엘 평원에서 대를 이어가며 포도원을 가꾸어 온 나봇이라는 농부가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포도원이 아합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자기에게 넘기라며 여러 가지 제안을 해보지만 나봇은 왕의 청을 완강히 거절합니다. 그 때문에 아합은 속병이 날 정도였다지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이세벨은 음모를 꾸며서 나봇을 곤경에 빠뜨리고, 사람들을 매수해서 그가 '하나님과 임금님을 욕하였다'고 거짓증언을 하도록 합니다. 나봇은 결국 이세벨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돌에 맞아 죽고 맙니다. 연고자가 없는 땅은 왕에게 귀속된다는 법에 의해 아합은 소원대로 포도원을 차지하고는 흐뭇해합니다. 그런데 그가 한가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그의 행사가 하나님의 눈에 거슬렸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그와 그의 후손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을 거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예후의 길, 하나님의 길

이 예언은 예후라는 사람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아합 왕의 아들인 요람이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스르엘에 머물고 있을 때, 예후는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 맙니다. 이스르엘은 이래저래 피 흘림의 땅이 되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의 피가 흘렀고, 나봇의 억울한 피가 흘렀고, 요람의 피가 흐른 곳입니다. 예후는 왕이 된 후에 바알 신앙에 물든 사람들을 처단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호세아 선지자의 칭찬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호세아는 바알 신앙에 물든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거듭해서 호소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바알 종교를 척결한 예후의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것입니다. 예후가 취한 방법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예후의 혁명은 활과 칼, 폭력과 살인으로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나봇의 피를 흘리게 한 아합과 이세벨의 죄에 대한 심판이 단호했던 것처럼, 비록 바알 종교 숭배자라고는 하지만 무지한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해버린 예후의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호세아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반대자들의 피로 얼룩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알 숭배자들에게도 은총을 베푸셔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하십니다. 풍요로움에 팔려갔던 그들의 넋을 되찾기 위해 주님은 최선을 다하시는 것입니다. 피 흘림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심판이 아니라, 값없이 베풀어진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후의 길은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씨를 뿌리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화의 땅이 반역의 땅, 피 흘림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겁니다. 배반의 땅인 이스르엘이 본래의 풍요로움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곳이 살인과 폭력과 테러가 근절된 땅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먼저 시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온 땅의 피조물들과 새로운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활과 창 등 전쟁 무기를 없애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과 진실함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다가서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때 나뉘었던 하늘과 땅이 만나게 됩니다. 마침내 하늘의 '덩더꿍'에 땅이 '얼쑤'로 호응하게 됩니다.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21-22)


전쟁의 그림자가 도처에 드리워있습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분쟁과 테러의 소식들이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라고 말하면서 전쟁 준비에 열중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초강대국의 횡포를 보면 피를 부르는 예후의 칼날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당장 바알에게 팔린 백성이라 해도 여전히 당신의 백성으로 여기십니다. 한때 잘못된 길로 나아갔다 해도, 언젠가는 돌아올, 아니 돌아와야 할 백성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칼과 활을 치우십니다. 그리고 의와 진실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그들 곁에 다가서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의 피가 흐른 땅에서, 하나님은 평화의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 일에 동참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상처가 있는 곳,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틈입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평화를 위해 마음의 심지를 돋워 이 땅의 어둠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정의의 씨를 심으면 하나님은 정의의 비를 내려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는 로루하마가 아니라 루하마이고, 로암미(은혜를 받은 자)가 아니라 암미(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땅은 피 흘림의 땅 '이스르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씨를 뿌리시는 본래의 '이스르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