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 천국에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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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25:34-40
설교일시 2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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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산다는 것
마25:34-40
(2003/1/12)


관계가 지배하는 사회

우리말에서 '오만가지'는 '너저분하게 많은 여러 가지'를 뜻하고, '오만상'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형상'을 뜻하고, '오만 소리'는 '수다하게 지껄이는 구구한 소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인지과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하루에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답니다. 재미있지요? 우리말이 전혀 근거 없는 과장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희망과 절망을 오가고, 감사와 분노 사이를 오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감정을 숨기며 삽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는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괜찮아' 하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속으로는 괜찮지 않은데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 사람이 무안해 할까봐 하는 말이거나, 자신이 속 좁은 사람으로 비춰질까봐 지레 하는 말일 겁니다.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서양은 법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동양은 관계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는 인정머리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불합리하고 부정한 일을 행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정실인사를 하지 않겠다면서, 인사청탁을 해오는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할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말은 좀 야박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적당주의'와 '보신주의'의 관행이 낳은 사생아들입니다. 이것을 끊기 위해서는 단호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정의 문화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의 통합과 합리성을 깨뜨려서는 곤란합니다. 우리 사회의 병폐 가운데 하나인 '패거리문화', 즉 '우리가 남이가'주의는 우리 사회의 발전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모든 참된 삶은 관계라 했습니다. 나는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만 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저절로 주어진 관계이든, 우리가 선택한 관계이든, 그런 관계를 아름답게 가꾸어 갈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가족, 직장 동료, 교회 교우들, 동호회 회원들, 지역사회 주민들…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가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들과의 관계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신다는 말입니다. 찰스 쉘던의 유명한 책 『예수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In His Steps』는 주님을 삶의 한복판에 모시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입니다. 선택은 다른 가능성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려깊게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기분내키는대로 살아서는 곤란합니다. 자명한 길이라면 모르겠으되,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는 사안에 대해서는 '지금 예수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는 말이야?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아나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우리가 이 말씀을 정말 잘 안다면 적어도 우리 삶은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의인의 삶을 절반이라도 닮아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매우 급진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얼마나 오래, 혹은 얼마나 잘 믿었느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나그네 신세가 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갔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에 대해서 진정으로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시간을 내고, 물질을 바치고, 땀을 흘렸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알지만, 이 본문의 도전이 우리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교회에 젊은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교인들은 기대에 찬 심정으로 그 목사의 첫 설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젊은 목사는 힘있게 설교를 했고, 교인들은 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예배를 마치자 교회의 원로 몇 분이 목사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면서 "참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는 다음 주일에도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 내용은 기독교인은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표정이 그렇게 밝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마쳤을 때 교인들은 목사에게 다가와 의례적인 악수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세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 젊은 목사는 본문은 다르지만 역시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몇 사람은 팔짱을 끼고 목사를 노려보기도 했습니다. 교인들이 왜 이렇게 화가 난 줄 아십니까? 그들은 비로소 목사의 설교가 자기들을 향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캐넌'(canon)이라 합니다. '척도' 혹은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을 재는 척도이고, 우리가 마땅히 의지해야 할 삶의 기준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참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소홀히 하면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 곧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기가 막힌 은유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의 교회됨은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신 예수님, 세상살이에 지쳐 살맛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삶의 소망을 회복시켜 주셨던 예수님, 바로 그 분의 손과 발이 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또한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잠17:5)이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잠19:17) 했습니다. 저는 가끔 동화작가이신 권정생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를 떠올리곤 합니다.


만나는 사람을 다 예수님으로

<얼마 전에 가까운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할 수 없이 완행기차를 타고 왔다. 그런데 기차 안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자리를 내주면서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가까운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릴 테니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아주머니는 기어코 앉기를 권해서 황송하게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앉아서 무심코 아주머니께 혹시 교회 나가시는 분이 아니냐고 여쭈었더니 아주머니는 금방 반색하면서 그렇다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해하면서 기뻐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의성지방 시골교회 집사님인데 한 십 년 전에 이상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꼭 옛날이야기 같은 내용이었다.
어느 날 아주머니는 몹시 바쁘게 집안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귀찮아서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거지에게 박대를 하며 내쫓은 것이다. 그런데 그 거지가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흘끗 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이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나가 보니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허사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십 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했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말했다.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중에서)


권정생 선생님은 그 시골교회 아주머니는 가장 복된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분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 말에 공감합니다. 누구나 그 아주머니처럼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보인다면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에 처음 온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난 사람들 같아 보인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사람들을 의심하도록 교육받아왔습니다. "이웃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 낯선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우리 속에 각인되었던 것이지요. 독재정권 시절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세월은 이제 지나간 듯 싶지만, 소위 말하는 무한경쟁사회가 우리 표정을 굳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을 혹은 동료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일단 대립각을 세우고 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으로 보기는 고사하고 원수나 경쟁자나 수상쩍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천국에 산다는 것은 누구를 대하든 그를 예수님을 보듯 바라보고, 대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호부조 전통의 회복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다운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참 사람이 되는 길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결국은 성경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최소의 표현이 뭔지 아시지요? 그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이고, 헐벗은 사람은 입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상호부조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느 집에 잔치가 벌어지면 온 마을 사람들이 기쁨을 함께 나눴습니다. 달걀 한 꾸러미를 가져오는 분도 계시고, 두부를 만들어오는 분도 계시고, 메밀묵을 쒀 오는 분도 계시고, 가져 올 것이 없는 분들은 부엌일을 도맡으면서 이웃간의 정을 돈독하게 했습니다. 저는 이런 상호부조 전통이 오늘에도 되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사람됨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수입의 일정한 부분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떼어놓아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추수를 할 때도 밭의 한 모퉁이는 남겨두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이웃들의 몫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정도 아니었고 자선행위도 아니었습니다.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의 마땅한 의무였던 것입니다.

가족들끼리 서로 합의해서 다만 수입의 1%만이라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우리는 삼중적인 행복을 맛볼 것입니다. 첫째는 보살핌을 받는 이들이 느끼는 행복이고, 둘째는 나눔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맛보는 행복이고, 셋째는 돈의 인력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진 자신들을 바라보는 행복입니다. 가족들끼리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십시오. 그리고 소비를 절제함으로 마련한 돈을 꼭 필요한 곳에 보내십시오. 그럴 때 그 가정은 소중한 생의 진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건강한 가족관계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게는 하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청파의 모든 가족들이 시민단체나 사회복지단체에 정기적인 후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적더라도 그런 작은 시작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동안 차별 받아왔던 사람들의 살 권리를 찾아주기 위한 일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들의 이동권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나, 철거민들의 주거권 확보를 위해 협력하는 것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병든 관계는 자기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관계는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우리는 남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남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행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바치고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이 요청에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