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 성령 안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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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전12:4-11
설교일시 200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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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의 삶
고전 12:4-11
(2003/1/19)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그려 보여주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참 역동적입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나타났고, 성도들은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또 날마다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음식을 나누어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누가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다고 말합니다. 이 짤막한 한 마디가 그들의 삶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그들은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행2:43-47). 그들은 삶으로 말하는 사람들이었고, 희망의 길, 하늘에 이르는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물론 성령의 현존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 내려가서 일년을 거기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어졌다고 합니다(행11:26). 그 말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그 한가지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이었다는 말일 겁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엡4:13).


혼자서는 이 목표에 이르기 참 어렵습니다.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한 젊은이가 선배에게 심각하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답니다. 부정적인 모습을 많이 보이는 제도 교회에 꼭 출석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의 고민을 들은 그 선배는 말없이 모닥불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장작개비 하나를 꺼내 가만히 옆에 던져놓았습니다. 얼마 후 그 장작개비는 불꽃이 사그라들고 연기만을 토해냈습니다.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선배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지금 우리가 함께 있어야 할 이유를 보고 있네."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교회도 허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온기를 나누어주면서 우리는 거룩한 삶을 향해 함께 성장해가야 합니다. 루터는 교회를 가리켜 '거룩한 창녀'라 했는데, 그 말은 교회의 현실과 목표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작고한 김남주 시인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시를 참 좋아합니다.


서로 함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어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어차 건너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나 가지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물론 이 시는 민주주의를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동지들을 기억하며 쓴 시이지만, 그럼에도 이 시는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할 우리가 불러야 할 소중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리의 최후 승리를 믿으며,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벗님들의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탄생한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현존 속에서만 교회는 교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예배와 친교와 봉사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바로 성령의 감화와 감동입니다. 성령이 떠난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1. 모든 특권과 차별이 사라진 공동체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경계선 속에서 살아갑니다. 단적으로 강남에 사는 사람과 강북에 사는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향유하는 문화의 질과 생활 방식의 차이, 사고 방식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이전에는 확연하게 보이지 않던 세대간의 경계선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많이 누리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경계선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자기 구역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다른 구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낯설어 합니다. 이것이 사회의 통합을 깨뜨리고, 위화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사회적 장벽들과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사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들을 만나는 것도 꺼리지 않으셨고, 그 사회질서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만나셨습니다. 여성들과도 차별 없이 만나셨습니다.

법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고들 말하지만 이 세상에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과 '차별' 받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특권과 차별이 사라진 곳이어야 합니다. 모두가 한 주님을 모시는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제일 먼저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이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바울 사도는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일체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 서로를 성숙하게 하는 공동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는 서로를 낯선 자로 여기지 않고, 귀중한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우리 곁에 있는 하나님의 사자로 인정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끼리끼리' 모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성정도 비슷하고, 취미도 비슷하고, 생활수준도 비슷한 사람이라야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과 만나야 이전에 보지 못하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다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은사는 스스로 만족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받은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병든 이들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도 가르치는 일에 그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찬양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그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 속에서 우리가 활용해야 하는 은사는 신령한 기쁨을 줍니다. 우리의 수고가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온전히 형제자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은 정말 신명난 일입니다.

다양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할 때 갈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는 '나'의 신앙적·인격적 성숙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중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처럼 형제자매들을 대할 때 우리는 진실한 신앙적 권고를 할 수도 있고, 그런 권고를 감사함으로 그리고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3. 사랑의 범위를 넓혀 가는 공동체

우리는 사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megalopolis)에 산다는 것은 더욱 더 쉽지 않습니다. 긴장감이 우리를 놓아주질 않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는 데 하면서도, 우리는 세상의 물결을 거스르지 못하고 허우적거립니다. 가까운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살 정도의 여유도 없습니다. 스트레스가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방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노래방', 'pc방', '비디오방'…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구획 속에서, 홀로 혹은 몇몇 사람들과 어울려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기들의 방에서 나오면 세상은 또 다시 거대한 감옥처럼 우리를 감시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불쾌한 일이나 힘겨웠던 일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대답을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참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최근에 경험한 기쁜 일,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거의 하나도 말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인생이 그렇게 힘겹기만 하기 때문일까요? 아닐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쾌한 기억과 힘겨운 일에 더 많이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다. 불행을 내면화하고 산다고 할까요? 인생에서 우리가 맞이하는 다양한 경험 속에서 행복을 걸러내서 간직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서 사라졌습니다. 모래를 걸러내 사금을 얻는 사람들처럼 우리들은 행복과 감사의 체로 우리 인생을 걸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외로움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삶을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음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한결 더 행복해질 겁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는 확대된 가족 공동체입니다. 우리 사랑의 범주가 혈연으로서의 가족에게 갇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그의 옛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몇 가지 부탁의 말을 담은 편지를 보냅니다. '나를 대하듯 그를 대해 달라', '그의 빚을 내 앞으로 돌려 달라', '그를 받아들임으로 내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이고 형제이고 자매'라고 말입니다.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애로서, 자매애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아니,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고립된 개체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덕분에 살아갑니다. 그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고마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공동체 속에서 만나는 사람은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섬기고, 영적으로 성숙시키라고 하나님께로부터 소중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역할을 받았는지는 각자 다르지만, 우리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청파 신앙공동체를 사랑의 터 위에 아름답게 세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차갑기만 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참 멋진 삶의 길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멋진 꿈을 함께 공유하면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서로를 섬기는 일에 소중하게 사용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