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 영혼의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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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23:8-15
설교일시 200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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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바이러스
마23:8-15
(2003/1/26)


두 가지 어리석음

데카르트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이 양식(良識, 건전한 식견)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어리석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어리석은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이를 가리켜 현자라고 부릅니다. 소크라테스는 현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진리를 다 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가 신들로부터 지혜로운 자로 인정을 받는 것은 자기의 無知를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부족한 줄 아는 사람들은 항상 남에게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현인 노자는 남을 아는 사람을 지혜롭다(知人者智) 하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밝은 사람(自知者明)이라 했습니다. 남을 안다는 말은 자기 외부, 즉 바깥 세상을 환히 안다는 말입니다. 우리 시대로 말하자면 지식인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안다는 말은 자기 속을 환히 들여다본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환히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거들먹거릴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자기가 지혜로운 줄 아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는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항상 가르치려고 합니다. 깊이 경청하고, 세심하게 관찰하기보다는, 가볍게 듣고 즉각 반응합니다. 그가 있는 곳은 항상 시끄럽습니다. 근거 없는 말일수록 수다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을 아낄 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아슬아슬합니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이랍니다. 한번 발설된 말은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아프지만 솔직한 진단을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들은 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들은 삶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사람이면 족한데, 자꾸 가르치려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박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저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우리가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내가 손해보는 쪽으로 선택을 하면 대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참 명쾌한 말입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우리는 말로 그 공허한 빈자리를 채워보려 합니다. 그런 말은 대개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곤 합니다. 목사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은 하나님에 관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아는 듯이 행세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모세도 하나님의 뒷모습을 힐끔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목사가 분명한 말을 해주기를 원합니다.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 때문에 목사들은 스스로 全知한 존재가 된 것 같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목소리가 큽니다. 사람들에게 확실한 답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견고한 것으로 보이고, 그들은 매우 신령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바다의 깊은 곳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찰랑거리는 파도만 보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요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5:12)는 말씀이 얼마나 치열한 현실인식 끝에 나온 말씀인지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 이론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견해가 많은 사람들을 파멸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지난 11일과 19일에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소위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에 관한 소문을 들으셨는지요? 그들은 북한에 의해 조성된 핵 위기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것을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라는 말도 좋습니다. 그들의 손에 성조기가 들려 있었던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회를 인도하던 목사들의 말과 기도는 우리가 결코 아멘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에 고정간첩 5만 명이 활동하고 있다든지, 수십 개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되었다든지,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으로부터 촉발된 촛불시위는 사실은 고정간첩들의 배후조정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등, 그들은 억측을 사실로 포장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주려 했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 두려움보다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독재자들과 거짓 종교인들은 그런 면에서 닮은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신앙이란 본래 사람들을 모든 매인 것으로부터 해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는 데 그 본령이 있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종교는 오히려 사람들을 가두고, 얽어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죄인으로 규정했고, 거룩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서열화하고 계층화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왜곡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맞는 절대적인 규범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영혼의 특색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단호하면서도 명쾌한 행동지침을 내리고 있습니다.


1)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랍비들은 제자들의 섬김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들먹거리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고, 형제자매들을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길벗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꾸 묻고, 귀담아들으면서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공자도 "세 사람이 함께 가는 길에 반드시 선생이 있게 마련이다. 그 중에 좋은 점은 따르고 그른 점은 고친다"(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형제자매들을 진리의 숫돌로 삼아 자기를 벼리는 사람들입니다.


2)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아버지는 주로 자식들 위에 군림하고 자기들의 생각을 강요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에는 가부장적인 지배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강조되는 곳에서는 창조적인 정신이 자랄 수 없습니다. 임제 스님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했습니다. 버르장머리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정신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 되라는 말일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3)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지도자' 소리 듣는 것 좋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감투자리가 하나라도 나면 서로 자기 차지라고 야단들입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지우고 또 지워야 할 종교인들조차 자기를 높이는 일에 마음을 쓰며 사니 참 가관입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해 애쓰는 종교인들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선한 선생님으로 부르는 부자 젊은이에게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막10: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보일 뿐, 스스로를 앞에 내세우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그에게는 드러내야 할 자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자기를 말끔히 비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영혼의 암표상

그런데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특권의 자리에 세우기를 좋아합니다. 천국 문 앞에서 입장권을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행세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암표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엄정하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13)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참견하느라고 하나님 나라의 현실 속에 발을 들여놓지 못합니다. 남의 허물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재미에 빠져서 스스로 천국의 기쁨을 포기합니다. 그것은 지장보살의 이타행이 아니라 영적인 몽매함과 무지의 소치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막8:15). 낡은 틀 속에 갇혀서 새로운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위선과 무능함을 경계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저명한 종교인들의 이름이 길바닥에 버려진 맛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전래 초기 계몽의 주체였던 교회가 이제는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5)


이 말씀은 회초리가 되어 우둔한 우리의 종아리를 치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말하면서,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만다는 말씀은 심판처럼 두렵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적인 존재가 되는 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어느 분은 '된 사람'의 특색을 세 가지로 말하더군요.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감싸안고, 자신에 대한 비판은 자성의 기회로 삼는 사람, 누구를 대하든 공경스런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 다른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영적인 예민함을 가진 사람.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인 교만이라는 영혼의 바이러스가 중세기의 페스트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낮추고 또 낮추십시오. 자기를 지우고 또 지우십시오. 함부로 가르치려 하지 말고, 삶으로 가리켜 보이십시오. 적어도 천국 문을 막아서는 사람들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것이 영적인 바이러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삶이 나날이 맑아지고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