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5. 식구(食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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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15:4-11
설교일시 20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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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食口)
신15:4-11
(2003/2/2)


식구, 물리적 실체

한 두 주쯤 전에 고향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작은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서 저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식들이 다 떠나고 작은어머니마저 병원에 입원하셔서, 혼자 적적하게 빈집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마침 저녁 때여서 밥을 짓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였습니다. 겨울만이라도 인천에 있는 누님 댁에 올라가시는 게 어떠냐고 말씀드렸더니, 개를 가리켜 보이면서 "쟤도 식군데, 어떻게 쟤만 두고 가? 남에게 맡기면 그것도 폐가 되고, 여름이라면 밥이라도 많이 주고 갈 텐데, 지금은 밥이 얼어버릴 테니 말여." 작은아버지가 잠시라도 집을 비우지 못하는 것은 개 한 마리 때문이었습니다. 작은아버지에게 그 개는 '식구'였습니다. 도시 사람들처럼 개를 집에서 키우지도 않고, 안고 쓰다듬고 온갖 응석을 다 받아주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 개는 '식구'였던 것입니다. 주인이 먹는 밥을 얻어먹으니 '식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얼핏 안식일 계명이 떠올랐습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


안식일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람과 더불어 사는 짐승들에게도 안식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급진적인 생각인 듯 싶지만, 동물들을 데리고 일을 해본 분들은 이 계명이 왜 소중한지를 알 것입니다. 동물도 쉬어야 합니다.

'식구'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눈물겨운 울림이 있습니다. 가족은 제사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집 '家' 자는 지붕(갓머리 '면'  ) 아래 돼지('시' 豕)가 있는 모양인데, 옛날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돼지를 잡아 바치곤 했답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란 함께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은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실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식구는 말 그대로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실체입니다. 밥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어진 사람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이웃들도 다 한 식구였습니다. 이웃이 불쑥 찾아와도 걱정이 없습니다.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그만이니 말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고루 가난하던 시절이니 찬거리 없다고 걱정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밥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

그런데 우리는 '식구'라는 단어 속에 담겨있는 눈물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배고픔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식구'라는 말이 그렇게 실감나지 않을 겁니다. 먹어도 함께 먹고, 굶어도 함께 굶어본 사람들, 그들이 식구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관념도 없습니다. 제 주변에는 배가 고프면 서럽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배고프면 형이상학은 자취를 감추고, 적나라한 식욕만이 그분들을 지배하는 것 같더군요.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식사가 다소 늦어졌을 뿐인데도 그분들은 서럽다는 말을 씁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그분들의 배가 조상들의 신산스런 삶에 대한 기억의 저장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우리 삶의 '상부구조'를 가리킨다면 '식구'라는 단어는 '하부구조'를 가리킨다 말할 수 있습니다.

밥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 그들이 식구입니다. 애굽을 빠져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늘의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언약의 백성이기도 했지만, 밥을 나누어먹은 식구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 체험이 더욱 그들을 하나로 묶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밥으로 묶어진 사이는 좀처럼 해체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급식 이적이 한 소년이 바친 보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잘 압니다. 자기의 것을 누군가를 위해 내어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요6:35)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밥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눈 이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생명의 밥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 말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새벽빛을 받으며 서 계시던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힘겨운 노동에 지친 제자들, 밤새도록 노력했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한 허탈감에 사로잡힌 제자들, 더욱이 스승을 잃어서 줄 끊어진 연처럼 처량한 신세가 된 제자들을 위해 주님은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21:12)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밥을 먹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 받는 삶의 길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 그것처럼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모세는 동족들에게 복 받는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남에게 꾸지 않고 꾸어주며 살게 되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고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들의 복은 '그렇게 사는 삶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물 여덟 살 나던 해에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총살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는 다른 많은 사형수들과 함께 유형열차를 타고 시베리아의 옴츠크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열차가 잠시 토볼스크역에 멈춰 섰을 때 사형수들을 위로하기 위해 장교의 부인들이 그들에게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한 장교의 아내가 더운 차를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장교의 아내는 가슴속에서 작은 책 한 권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이었습니다. 옴츠크 감옥에서 그는 죽음을 기다리며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난 다시 태어나 최고에 이를 거예요."

그는 감옥에서 예수님과 만났던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마지막 목표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고 증명한다 해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호산나는 회의라는 시련의 도가니를 지나왔다." 예수님이 그에게 뭔가를 주시마고 약속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소망이었고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삶의 목표를 확립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유형적인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무형적인 것이 어쩌면 더 소중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육신을 입히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자라나는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이 누리게 되는 유형적인 보상들은 덤에 지나지 않습니다.


둘째, 가난한 형제를 최선을 다해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뿐이 아닙니다. 움켜쥔 손을 펴야 한다고 하십니다. 손처럼 우리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습니다. 굳게 움켜쥔 손은 남과 소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드러내줍니다. 사이가 나쁜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우리는 둘의 손을 잡아끌어 악수를 유도합니다. 악수를 하기 위해서는 손을 펴야 하고, 손을 편다는 것은 마음을 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손을 편다는 말은 그들을 식구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외로운 이들의 벗이 되어주는 것은 사람된 도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벳새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실 때 예수님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정체성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정말 어려운 사람들인지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배고프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을 뿐입니다. 배고픈 사람이니 먹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이게 사람의 길이고, 모든 사람들이 한 식구가 되는 길입니다.


셋째, 구제할 때 인색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 가운데 하나가 '인색(吝嗇)'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남에게 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색은 영혼의 질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자기 속에 갇히고 맙니다. 히브리 시인들은 이런 이들의 허망한 끝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39:6)


우리는 이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들의 재물은 물이 써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쌓는 것은 흩어 구제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준 것만이 영원성을 부여받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의인의 삶을 기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112:9)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당신을 우리를 살리기 위한 밥으로 주셨습니다. 그 밥은 또한 제물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밥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함을 통해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밥이 될 차례입니다. 소박한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일단 인색한 마음의 한 귀퉁이를 허물기 시작하면 그 속으로 하늘의 빛과 평화, 그리고 영적인 자유가 깃들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한 식구가 된 우리 모두 그러한 자유를 넉넉히 맛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