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7. 불평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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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37:1-11
설교일시 200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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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하지 말라
시37:1-11
(2003/2/16)


영혼의 발신음

며칠 전 심방을 갔다가 태어난 지 50일쯤 된 박경선 씨의 아기를 보았습니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이 참 평안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기는 외부의 소음에 따라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손과 발을 버둥거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소리에는 불안한 반응을 보이고, 어떤 소리에는 평안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는 포대기에 싸여 있는 아기처럼 실내에서 나는 생활 소음에 귀를 기울여보았습니다. 상에 컵을 내려놓는 소리부터,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발자국소리, 사람들의 옷이 가구에 스치는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다양한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마치 물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이성적 분별력을 발동시키지 않고 그 다양한 소리들을 그냥 소리로만 들어보았습니다. 그 다양한 소리들을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은, 그만큼 익숙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아기는 어쩌면 눈으로 세상을 보기 전에 소리로 세상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소리는 아이의 정서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겁니다. 아기에게 가장 편안한 소리는 물론 엄마의 심장 박동소리와 다정한 음성이겠지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소리들을 만들어내며 삽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세상을 향한 내 영혼의 발신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설거지를 할 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면 그는 기분이 괜찮은 편일 겁니다. 하지만 세찬 물소리와 함께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왈강달강 들려온다면 우리는 그의 마음 상태가 편치 않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싶지 않다는 뜻을 소리로서 표현하기도 합니다.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것만해도 속이 상한데 거기다가 문을 딸깍 잠그는 소리까지 덤으로 듣고 나면 부모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소리는 이처럼 어떤 한 존재가 처해있는 정신의 풍경을 우리에게 넌지시 드러내줍니다. 교회당에 들어올 때에도 바람처럼 소리 없이 들어오는 분도 있고, 마치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이 큰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제 방에 앉아서 주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만 듣고도 누가 오셨는지 알아차리곤 합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내는 소리도 그의 존재를 드러낸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곧 우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거칠고 투박한 말을 쓰면서도 그 마음은 봄바람처럼 따뜻한 분들도 계십니다. 세련된 말을 구사하면서도 속은 뱀처럼 차가운 이들도 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을 통해 생명의 봄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감사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항상 사람들의 마음에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늘 심각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이들과 일들을 향해 그르렁거립니다. 그는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는 법을 익힌 사람처럼 보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현재를 살라

저는 이번 주초부터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한 주 동안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대로 지켜보기로 작정했습니다. 모든 것을 나 나름의 좋음과 나쁨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선입견도 갖지 않고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리고 내게 요구되고 있는 다양한 역할들을 투덜거리지 않고 수용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판단과 투덜거림을 그만 두어서인지 제 마음은 참 평안했습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서 울화를 삭이는 일도 없었고, 이런저런 걱정으로 초조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져, 나의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어도 마음의 평안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표준새번역 1-2)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말아라.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표준새번역 7b-9)


살다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평탄한 길을 걷는데,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랍니다. 불의한 자가 잘 사는 것을 시새우지도 말랍니다. 그들은 풀처럼 시들어버릴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세상사를 돌아보며 탄식합니다. 미국의 오만함 때문에 분노하고, 북한의 태도에 대해서 화를 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불평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오만함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들은 보지 않고, 자기의 폭력성 때문에 멍든 가슴들은 보듬으려 하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말아라." 그것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이든 다 인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고, 무고한 사람들이 전쟁의 공포 속에 살게 되는 세상, 굶주린 이웃들이 고픈 배를 부여안고 잠드는 세상은 분명 극복되어야 할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말라구요? 이 말은 우리에게 투덜거리지만 말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그 일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시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소중한 삶의 한 요소입니다. 교실이 어지럽혀져 있다면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보다는 걸레를 들고 청소를 시작하는 것이 낫습니다. 굶주린 이웃을 보거든,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에 앞서서 그를 위해 밥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처럼 해야 할 일에 집중하다 보면 우리를 사로잡았던 격정이나 분노는 매력을 잃게 됩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3-5)


불평하지 않는 비결

우리가 불평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은 주님을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깊이 염려하고 계십니다. 12일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강당에서는 '캔들 데이 촛불상'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이 상은 상업성에 물든 '밸런타인 데이'를 봉사와 사랑의 뜻을 기리는 '캔들 데이'로 바꾸자는 문화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대학생 대중문화감시단이 올해 처음 제정한 상인데, 자신을 희생해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을 기리는 상입니다. 이 상의 첫 번째 수상자는 이지선 씨였습니다. 이씨는 2000년 7월에 학교 도서관에서 집으로 가다가 음주운전자가 모는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얼굴을 포함한 몸 절반 이상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이씨는 처음에는 '왜 나를 살렸느냐'며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씨는 주위의 사랑과 독실한 신앙생활로 11차례의 피부이식 수술과 엄지를 제외한 양손 손가락 끝을 모두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으면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키워갔습니다.

2001년 3월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씨는 그해 4월 자신의 홈페이지 '주바라기'를 통해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르려 자신이 겪은 아픔과 이를 이겨나가는 과정뿐 아니라 상처 입은 모습을 담은 현재 사진도 자신있게 내놓았습니다. 그는 절망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를 잃음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가슴으로 안을 수 있게 됐다"고 말합니다. 이씨는 예쁜 얼굴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무지갯빛 꿈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삶의 더 큰 신비를 보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함께 느끼게 되었고, 주님의 더 큰사랑과 마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불평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불평은 정신적인 허약함의 징표입니다. 물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혜이고 용기입니다.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신앙을 가리켜 '존재에의 용기'라고 말했습니다. 소모적인 투덜거림을 그치고, 자기가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해 나가다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은 존재의 연금술입니다. 피하고 싶은 현실, 맘에 들지 않는 현실조차 내 삶으로 받아들여 그 속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워내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할 수 있다면 이 쓴잔을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 시간에도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여쭤보았습니다. 그때도 역시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생의 마지막 시간에, 하나님의 품에 자기 영혼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납니다. '왜?'라고 수없이 물어봐도 납득할만한 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랑을 믿는다면, 이제 불평을 그치고, 한 걸음 한 걸음 주님 안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들어내는 소음은, 그리고 우리가 말과 행실을 통해 보내고 있는 메시지는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빛을 가져갈 수도 있고 어둠을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조그마한 희망과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행하는 일들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