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8. 매임을 넘어 자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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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11:24-26
설교일시 200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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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임을 넘어 자유로
히11:24-26


무의미성에 직면하여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雨水 절기가 들어있는 2월을 가리켜 '봄 신명달'이라고 이름 붙인 분이 계십니다. 어김없이 이른 봄비가 내려 온 세상이 물기로 촉촉해지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눈물과 비탄으로 이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병을 비관한 한 사람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빚어낸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 참사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잊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지요? 범인은 "많은 사람과 함께 죽고 싶었다"고 말했답니다. 자기 생을 긍정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정신적 무너짐이 세상을 얼마나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우리는 공포스럽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무의미성'에 사로잡힐 때 흔히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과거의 허무주의자들은 그 공격의 방향을 자신을 향했습니다. 그래서 고립감속에서 살거나 심한 경우 자살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그 공격의 방향이 타인과 세상을 향할 때 그 결과는 매우 참혹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기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 데 나는 행복하지 않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도 않고, 나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살아있다는 것이 지겹구나.' 우리는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에게서 삶의 무의미성에 부딪힌 사람의 절망을 봅니다. 그가 아랍인을 쏴 죽인 이유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입니다. 이성적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죄책감도 없습니다. 이것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망이란 말과 희망이란 말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망이란 사람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꿈입니다. 좋은 집을 장만하겠다든지, 성형수술을 해서 멋진 모습으로 변신하겠다든지, 좋은 직장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소망입니다. 하지만 희망은 자기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피에르 신부). 그러니까 희망이란 우리 삶의 토대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희망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삶의 축복

저는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의 샘물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삶의 자세를 바로잡게 됩니다. 필립 시먼스(Philip Simmons)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 주의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면서, 평론과 단편소설을 발표하는 등 주목받는 활동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루게릭병(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걸려, 5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하루하루를 '한 번에 찻숟가락으로 하나씩 생명력을 덜어내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어찌 보면 절망의 나날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날마다 당하는 이 느리고 성가신 폭력'에 시달린 지 8년이 되었건만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산술적으로 보면 벌써 죽었어야 하지만, 그는 오히려 고통을 통해 '살아가는 기술'(the art of living)을 터득했습니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가 항상 눈앞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날은 그에게 '결함 있는 삶이 어떻게 충만한 삶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러한 성찰 속에서 '불완전한 삶의 축복'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팔다리를 움직여 세상일을 할 수 있는 날은 그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축복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침마다 침대에서 일어난다. 그 의무가 죽어가는 것이든, 다른 일을 하는 것이든. 나는 내 힘으로 아직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아침마다 일어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노나 증오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인생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항상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작고 사소한 선택도 있고, 크고 결정적인 선택도 있습니다. '커피를 마실까, 녹차를 마실까' 하는 것은 작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현실 안주와 자유 가운데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쉽게 선택할 수 없습니다. 작고 사소한 선택은 우리 삶의 다양한 빛깔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크고 본질적인 선택은 우리 삶의 의미와 깊이 연관됩니다. 아모스는 영적인 자유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마샤는 빵을 안정적으로 얻기 위해 왕의 비위를 맞추는 길을 택했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였던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눈물로 작별하고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의 굴곡 많은 삶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 자기 포기의 길을 택했습니다. 예수님은 살고 싶은 당신의 욕망을 접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음의 쓴잔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삶을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1)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다.
2) 죄의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다.
3) 애굽의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더 값진 것으로 여겼다.

저는 모세의 선택이 우리 모두가 택해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분깃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세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를 향한 도상

모세는 먼저 '공주의 아들'이라는 안정된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애굽의 화려한 궁중생활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애굽의 모든 학문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애굽의 궁중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광야'가 그를 부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애굽의 관리에게 학대당하는 히브리인을 보았을 때 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인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 우발적인 행동 이 도화선이 되어서 그는 결국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면서 때늦은 후회를 했을까요?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면 그는 달리 처신했을까요? 쉽게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어차피 궁중의 사람이 아니라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내면의 소리, 곧 광야의 부름에 응답했던 것입니다. 그가 택했던 길은 몰락의 길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통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타락'이란 우리의 영혼이 한곳에 매여있는 상태입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을 때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놓아야 하늘의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죄의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영혼을 어둡게 하고, 삭신을 노곤하게 만드는 향락을 버렸습니다. 향락이란 '자기에 대한 병적인 탐닉'입니다. 향락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랑을 모릅니다. 사랑은 자기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나는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쾌락이 아니라,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길은 고생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임을 알았고, 백성들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시련의 풀무를 택했습니다. 그는 물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덤조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실패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애굽의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더 값진 것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욕을 받았다니요? 우리는 여기서 거대한 영혼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봅니다. 모세가 택한 삶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궁극적 자유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겪은 온갖 시련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유목민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착 이후에 서서히 그 땅의 문화에 동화되어가면서, 우상숭배에 빠져드는 백성들을 세겜 땅에 모으고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우리도 여호수아의 요구 앞에 서있습니다. '공주의 아들'이라는 호칭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종'이로서의 소명입니까? '애굽의 재물과 죄의 향락'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자유입니까?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요구한 후에 단호히 말합니다. "나와 내 집만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누가 뭐라 해도, 세상 사람들이 다 여호와를 버린다 해도 나는, 그리고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 이게 믿음입니다. 그는 눈치보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익인지 따지지 않습니다.

물론 살다보면 우리는 자유의 길에서 벗어나 매임의 길로 접어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세상은 우리를 자기의 영향력 아래 확고하게 붙잡아두려 합니다. 하지만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은 영적인 유목민입니다.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은 삶의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죄의 습성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 사람으로 성장해 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