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9.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
설교자
본문 마 26:36-46
설교일시 20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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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이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을 그곳에 머물게 하시고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야고보와 요한)은 데리고 가셨지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특별한 주문을 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피곤했는지 그 세명의 제자들은 비몽사몽이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 시간에도 기도 하셨습니다.
“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
“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제자들도 이 기도에 동참하기를 바라셨으나 제자들은 자고 있었고 예수님이 이를 보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너희들 마음은 나와 함께 하고 싶으나 몸이 피곤하구나”
제자들은 무엇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참으로 곤란한 상황은 3번이나 반복되었다. 결국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이끄는 무리들이 유다와 함께 예수님 앞에 오게되었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깨어 있지 못한 습관이 가져온 참사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참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다. 사망자 수만 약 200명이 넘고 실종자도 300여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 시작은 상처 받은 한 영혼의 광기로 시작되었지만 그 피해를 생각할 때 그가 뿌린 신너 2통 만으로는 그렇게 큰 피해가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번 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은 그 본 화재가 났던 열차 보다 그 옆 선로에 들어온 1080호 열차에서 더욱 많이 났다고 합니다. 약 30:70이라고 하더군요.
왜 그랬습니까? 저는 그것이 습관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관사가 열차에서 내릴때는 열쇠를 뽑아내려야한다는 원칙으로 시작된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그것이 기관사 개인의 판단 착오였는가 사령실의 잘못된 명령 때문이었는가 시비를 가리고 있습니다만 여하튼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열차에 불이 붙은 상황 가운데에서 모든 객차의 문을 열 수 없게 운전 열쇠를 뽑아 내린다는 것은 말도 안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처구니 없는 판단실수는 일어났고 많은 희생자를 만들었습니다. 만일 그 때 그 기관사나 사령실에서 평소처럼 기관사가 열차에서 내리면서 열쇠를 뽑아 내려야 한다는 그 습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상황판단을 잘 해 그 안에 타고 있는 열기에 휩쌓여가는 승객들을 생각했다면 피해는 훨씬 적었을 것입니다.

선사중에 마조의 제자인 방온 거사는 물 긷는 일, 장작 패는 일과 같이 사소한 작은 일을 통해서도 도통했다고 합니다. 물을 길으면서도 오 내가 물을 긷고 있네, 장작 하나를 패면서도 오 내가 장작을 패고 있네 하며 진리 가운데 행하는 자신의 삶을 경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진리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도 진리와 점점 멀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 있어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권능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들의 영혼이 우리의 그릇된 습관과 사고로 잠들어 있으면 주님께서 깨어 나와 함께 기도하자라는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 입니다.

누가복음의 평행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가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나와 활동 하시기 전에 라든지 제자들을 모을 때라든지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 늘 기도하러 산에 가셨습니다. 오늘의 문제가 되는 습관은 예수님의 기도하러가신 습관이 아니고 그 예수님과 동행 했던 제자들의 습관입니다. 그들은 정말이지 늘 힘든 생활을 하였습니다. 잠자리도 편치 못했고 밤에도 배를 타고 바람부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다녀야 했고 끼니 때면 먹을 것을 얻으러 동네로 들어가야 하곤 했습니다. 그런 힘든 생활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따라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의 제자 무리에 들어와 몇 주, 몇 달은 주님을 따라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년 수가 더해가면서 ‘기도는 아무나 하나 예수님이나 하시는 거지, 우리는 그저 쉴 때 쉬고 잘 때는 자도 돼’라는 생각이 굳어 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공생애 동안의 제자들과 관련된 말씀을 보면 그 어디에도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습관을 따라 기도했다는 기록이 나와있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이 말씀이 그 당시 제자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 기도해야 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오늘을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금도 들려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형식화 되어 가고 있는 우리의 예배를 갱신하고 생기없는 습관적이고 관성적인 모습으로 변해 버린 껍질을 깨고, 그 속에서 잠들어 있는 영을 깨워 주와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노력을 세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경종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약합니다. 우리들이 마음에 주님을 뜻을 행하려하는 소망을 품어도 기도하려는 뜻을 세워도 우리의 연약한 육신은 깊은 잠에서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새벽기도를 시작한지 약 6년째가 되가고 있는데 아직도 시계를 맞추어 놓고 잡니다.
한 젊은 목사님은 알람을 3가지나 맞추어 놓고 사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명종, 핸드폰, 전화국에서 해 주는 모닝콜까지. 그 목사님은 알람을 여러 가지 많이 쓰는 것은 창피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내가 새벽에 일어나 기도함으로 하루를 시작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딱딱하게 굳어버린 습관들에서 우리들의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는 좋은 자명종이 필요합니다. 우리 기독교 안에는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아주 성능 좋은 경종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예배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그분으로부터 생명의 말씀을 들음으로 영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큰 통로인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의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습니까? 말씀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죄와 먼지가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까?

둘째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명종이 아무리 울어도 우리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일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향하여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약하게 만드는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들의 생활을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육신을 약하게 만드는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늦은 시간까지 뻔한 연속극을 본다든지, 사람들과 비건설적인 만남을 갖는다든지, 전화기가 뜨거워질때까지 통화를 길게 한다든지, 통장에 숫자 하나 늘이기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일하는 것들로 인해 우리의 육신을 스스로 약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을 여러 습관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우둔하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제제해야 합니다.
사순절이 있습니다.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의 굳어진 마음들, 습관들을 깨어버리기에 너무 좋은 시간인 것입니다. 생각없이 먹던 음식들, 습관화 되어 있는 카드 사용, 그야말로 언어 생활, 식생활, 경제생활, 문화생활 전반에 걸쳐 내 생활의 , 우리 가족의 여러 삶의 굳어진 모습들을 깨어 버릴 수 있는 시간으로 삼아으시길 바랍니다.
이는 또한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학교 때 상업선생님 친구분중에 시각장애인으로 점자로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 계셨는데 어느날 찾아 갔더니 거친 돌 바닥에 굳은 손끝을 시뻘개질 때까지 갈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무엇 하느거냐 물으니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손끝으로 책을 읽지 않는가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손끝이 무뎌져서 점자책을 보기가 힘들어졌지 그래서 얼마전부터 매일 이렇게 돌위에 손을 갈고 있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꾸 무뎌져가는 영을 깨우기 위해 얼마나 의식적으로 얼마나 지속적으로 노력하며 살고 계십니까?
정말 주님과 함께 깨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의식적인 노력들이 꾸준한 노력들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주님을 만나세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그들이 성전에 들어가 시간을 정해 기도했습니다만 이미 그전에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것 그것은 그저 살아계셨던 주님을 만났던 것 보다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과 3년의 공생애를 보냈지만 그들은 주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언제 주님의 심정으로 깨어 기도했는가 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갈릴리에서 만나고 난 이후 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이전에 가져던 의심들이 벗어 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유대교의 유대인들의 죽어 있는 율법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님은 아직까지 십자가에만 달려계시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 삶의 현장 갈릴리를 찾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의 믿음 예수님을 믿되 십자가에 달려만 있는 분으로 내 삶의 실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조각상으로 믿음은 그야말로 죽은 믿음입니다.
교회 안에서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 사람 사람은 그래도 믿음은 좋아’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 좀 미덥지 못해, 종종 거짓말도 하고 한 성질하고 돈관계도 명확하지 않지만 그래도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도 하고 가끔 새벽기도도 나오고 직분도 맡았잖아’ 이런 뜻을 담고 있는 말 아닙니까? 정말 그것이 믿음 좋은 것입니까? 나의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분리되어 지킬박사와 하이든처럼 분리되어 사는 것이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질펀한 삶의 현장, 가난한 어부들이 살던 곳,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곳 갈릴리. 내 삶의 갈릴리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의 가정에, 나의 일터에, 나의 언어생활에, 나의 경제생활에 그 현장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과 함께 깨어 기도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의 굳어진 영혼은 나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굳어짐은 가정에, 우리 교회 공동체에, 사회 공동체에 큰 아픔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그 음성 듣고 우리들의 무의미하게 굳어진 습관들을 깨어버리고 늘 주님과 동행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재흥 부목사의 설교)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