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이정표가 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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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34:10-12
설교일시 20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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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가 된 사람들
신34:10-12
(2003/3/9)


스승, 인생의 이정표

낯선 곳을 찾아갈 때 우리는 흔히 사람들에게 길을 묻습니다. 그곳 지리에 익숙한 사람을 만나면 다행이지만, 어설프게 아는 사람을 만나면 고생을 하게 마련입니다. 잘 모르면 그저 모른다고 하면 그만인데, 길을 잘못 가르쳐줘서 엉뚱한 곳에서 헤맸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겁니다. 이정표만 잘 되어 있다면 아무리 낯선 곳이라 해도 쉽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도 역시 길을 찾는 과정과 같습니다. 낯선 순간을 만날 때면 앞서 걸어간 사람들의 흔적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우리의 길을 선택합니다. 갈림길 앞에서 망설일 때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이정표가 될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했을까?' 물론 그의 길이 곧 나의 길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참고는 됩니다. 인생에 좋은 길 안내자를 만나는 것보다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인생의 길 안내자, 혹은 이정표로 서있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스승'이라 합니다. 좋은 스승은 우리를 참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숭고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캘커타에서 빈민들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쳤던 테레사 수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그는 '우리는 잠시 동안 그분의 일을 하다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가리켜 '하나님의 몽당연필'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몽당연필이 결코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잘못된 스승들은 사람들을 미혹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진리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대신에 자기가 쳐놓은 그물 속에 머물도록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도둑질해 자기의 지배 아래 둡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선함과 사랑보다는, 배타적인 선민의식과 교만함을 심어주는 종교인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뭔가를 가리켜 보이기는 하지만, 그 길은 자유의 길이 아니라 예속의 길입니다.


예수를 길로 삼은 사람들

길을 알되 제대로 아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비밀을 꿰뚫고 있는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푯대인 동시에 스스로 길이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사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다."(요7:28) 예수님은 '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삶은 참을 드러내는 삶이요, 참을 향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참' 아닌 군더더기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길에서 벗어나서 방황하곤 합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우리는 엉뚱한 길로 접어듭니다. 그러면서도 선뜻 돌이키지도 못합니다. 타성적인 삶의 관행을 벗지 못해 점점 세속적인 욕망의 늪 속에 빠져듭니다. 삶은 우리에게 경고음을 보냅니다. 실패를 통해서, 질병을 통해서, 인간관계의 어긋남을 통해서……그 경고음이 들려올 때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이정표들을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때때로 위대한 성인들이나 위인들의 전기를 읽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성서를 길잡이로 삼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우리를 참이신 하나님께 인도하는 이정표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도 모세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려 합니다.


이정표가 된 사람의 행동 원리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물론 모세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조건 고인을 미화하는 '장례식 기사(obituary)'와는 그 내용이 다릅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첫째,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지냈는지를 나타내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하나님을 비현실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하나님은 대단히 'real'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모세에게는 자기가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는 실패와 좌절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자신의 과오조차 영혼의 진화를 위한 디딤돌로 바꿔주실 능력이 주님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훌륭한 신앙의 위인들의 삶의 뿌리에는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의 권사님은 기도를 하실 때마다 첫 마디가 "하나님, 한 주일만에 뵙습니다"였습니다. 그는 한 주간을 하나님 없이 살았던 것이지요. 이래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숨을 멈추면 살 수 없듯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는 하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도 덧입을 수 없습니다.

둘째,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초기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는 자기는 그럴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자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무서운 전제주의 군주인 바로 앞에 서서 "내 백성을 해방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내밀어 홍해 바다를 갈랐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였습니다. 그는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거스르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이 세상에서 가시밭길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은 영원의 길, 하늘의 길과 잇대어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셋째, 민수기 12장 3절은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연단 받기 이전의 모세는 성정이 매우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젊었을 때의 모세는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감에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정의의 원리에 어긋나는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광야 생활을 거치면서, 또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하면서, 온유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냉철하고 강직한 사람이 아니라, '溫'(따뜻)하고 '柔'(부드러움)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따뜻함 속에서 자라납니다. 어머니의 품은 따뜻하지 않습니까? 무릇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습니다. 온유함이야말로 생명의 모태입니다. 예수님은 힘과 법을 앞세운 삼엄한 권력 앞에 다만 사랑과 용서라는 부드러운 무기로만 응수하셨습니다.

넷째, 모세는 변변한 무덤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를 지우며 산 분입니다. 몇몇 목사님들이 은퇴를 앞두고 자기 이름으로 된 기념 교회를 세우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 속상합니다. 불쌍합니다. 왜 자기를 위한 기념교회를 세워야 한단 말입니까? 그가 모세보다 위대하단 말입니까? 죽어야 사는 이치를 왜 모른단 말입니까? 그에 비하면 얼마 전에 돌아가신 소설가 이문구님은 얼마나 깨끗합니까? 그는 자기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하지 말 것이며, 문학비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자기가 죽지 않았음을 나타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에게서는 악취가 납니다. 하지만 쉼 없이 자기를 지워가는 이에게서는 향기가 납니다. 모세는 무덤조차 잃어버렸지만 그는 이스라엘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인장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정표로 우뚝 서있습니다.

오늘 장로로 취임하시는 윤석철 장로님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뒷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참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