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 인생의 봄날
설교자
본문 아가2:8-17
설교일시 2003/3/16
오디오파일
목록

인생의 봄날
아가2:8-17
(2003/3/16)


봄이 왔네, 봄이 와

춘분이 다가오면서 곳곳에서 봄소식이 들려옵니다. 지난 월요일 후배 몇 명과 도봉산을 찾았습니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쌓였던 눈이 녹아 산 초입은 매우 질척거렸습니다. 감성적인 후배 목사가 혼잣소리인 듯 말했습니다.

"봄이 질퍽질퍽하게 오네요."

'질퍽질퍽'이라는 단어가 환기시키는 느낌이 봄에 퍽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계곡에도 어느새 눈 녹은 물이 흥겹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듣는 물소리가 솔바람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짝을 찾는 새들의 노랫소리도 정겨웠습니다. 봄은 그처럼 소리를 통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서있는 나무들도 조금씩 물기가 배어들어 초록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한 그루씩 보면 아직 겨울인 것 같은데, 먼 곳을 바라보면 우듬지 끝에 번진 초록의 물결이 문지방을 넘고 있는 봄 신명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봄은 이처럼 흥겨운 소리와 연한 초록빛으로 시작됩니다.

요즘 저는 날마다 교회 마당가에 심긴 쥐똥나무와 회양목을 살피고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새싹이 나올까 하고요. 그런데 엊그제 처음으로 쥐똥나무의 버들눈을 발견했습니다. 교육관 뒷문 쪽에 심겨진 산딸나무 아래에 있는 나무였습니다. '야, 너 살아 있었구나.'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양 반가웠습니다. 지난 가을에 옮겨 심은 후 '과연 겨울을 잘 넘길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모진 겨울 추위를 이기고 기어코 뿌리내리기에 성공한 나무를 축하해주고 싶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올 봄은 예전에 비해 유달리 봄이 기다려집니다. 그래서 아직 꽃샘추위가 다 가시지 않았는데도 봄을 예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분은 나이가 드는 증거라고 하시더군요. 나이가 들면 어떻습니까? 분주한 일상 속에서 봄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게 사는 것보다는 봄기운에 달뜨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세레나데

봄은 사랑의 계절입니다. 땅 속에 갇혀 있던 생명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진군의 북소리처럼 울려서인지 우리 심장의 박동도 빨라집니다. 심장병을 앓는 이들은 봄 숲에 들면 그 생명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어 숨이 가빠진다고 하더군요.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기 때문일까요? 봄은 사랑을 잉태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왠지 누군가가 그리워집니다. 우리 민요 <봄이로세>는 임을 그리는 마음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고장 이 강산에 봄빛 따러 피어나고
방실방실 웃음을 웃고 하늘 하아늘 나뭇가지에
꽃바람이 불어오니 양춘 가절 좋을시고
홍안은 시절이 빛나시고 만화방창 욱어진디
임이 없어 한이로세


2절에 가면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소식마저 주지 않는 님'에 대한 탄식이 이어집니다. '시절은 다가오고 청춘은 다헌난디/안타까운 하소연을 어느 뉘라 알어주리'. 그래요. 이 봄에 여러분 모두 사랑하는 님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Shulammite woman)과 솔로몬 왕의 사랑 노래로 알려진 雅歌를 과연 성서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로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생명의 뿌리이고 본질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책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 사랑의 찬가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사랑 노래로 해석해왔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봄이 오자 멀리 떨어져 있던 젊은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에 목이 마릅니다. 꽃이 피고, 짝을 찾는 멧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젊은이는 일상의 굴레를 박차고 일어나 그리운 님을 향해 달려갑니다. 여인은 몸 전체가 귀가 되어 이제나저제나 님의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꿈인지 생시인지 언덕을 넘어 숨차게 달려오는 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여인의 숨결도 덩달아 가빠지고, 얼굴은 붉어집니다. 그리고 애인이 창밖에서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듣습니다.


나의 사랑 그대,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그대, 어서 나오오.
겨울은 지나고,
비도 그치고, 비구름도 걷혔소.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계절이
이 땅에 돌아왔소.
비둘기 우는 소리, 우리 땅에 들리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무화과가 열려 있고,
포도나무에는 활짝 핀 꽃이
향기를 내뿜고 있소.
일어나 나오오. 사랑하는 임이여!
나의 귀여운 그대, 어서 나오오.


행복과 전율이 온 몸을 관통합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행복의 순간에서 깨어나기 싫은 듯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습니다. 창 밖의 연인은 그래서 달콤한 목소리로 다시 노래합니다.


바위 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숨은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
그 사랑스런 모습을 보여 주오.
그대의 목소리,
그 고운 목소리를 들려 주오.


여우 떼를 잡아주오

이제 더는 연인을 기다리게 할 수 없습니다. 벌떡 일어나 님에게로 달려가려는데,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우 떼를 좀 잡아 주오.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원을
망가뜨리는
새끼 여우 떼를 좀 잡아 주오.


어쩌면 이것은 여인의 마음속에 일고 있던 두려움인지도 모릅니다. 혹시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끼어 들지 않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사랑나무에 꽃이 피어 흥겨운데, 작은 여우가 숨어 들어와 그 사랑의 관계를 허물어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작은 여우', 그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우는 변신에 능하다고 하지 않던가요? 자존심 내세우기, 신뢰 상실, 이기심, 시기심, 무관심, 잘못된 욕망……. 이런 것들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사랑의 관계는 미움과 원망의 관계로 변하기 쉽습니다.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는 '님'이 아닌 다른 것에 우리 눈길을 돌리도록 만듭니다. 우리 영혼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망가뜨리는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아직 작을 때 말입니다. 여우를 잡는 방법은 알고 보면 참 쉽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작은 여우를 잡는 방법을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님에게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곁눈질이 모든 관계상실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주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작은 여우는 우리의 눈과 귀를 세상을 향하도록 유도합니다. 바울 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거울 앞에 우리는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지요? 우리가 신열에 들뜬 듯 뭔가에 사로잡혀 있을 때, 거울을 보면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 것 말입니다. 기도란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삶의 템포와 방향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에는 여우가 깃들만한 잡풀이 우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님'의 말씀을 늘 되새김질하며 사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1:1-2)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여우의 잔꾀는 그야말로 잔꾀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당신의 '말씀'에게 맡기고 가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삼 시 세 때 밥을 먹는 것처럼 하루에 세 말씀만이라도 잘 씹어 먹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쓴다면 우리 삶은 분명히 달라질 겁니다.

또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찬찬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 속에서 약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느껴야 합니다. 숨 가쁘게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세상의 생명들이 나직이 고동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돋아나는 어린 싹에 비치는 햇살, 폴짝거리는 참새들, 축복을 내리는 손처럼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아야 합니다. 자연이라는 경전을 제대로 읽어야 우리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어린 여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관계의 회복

우리가 기도와 말씀에 대한 묵상으로, 그리고 자연이라는 경전 읽기를 통해 작은 여우를 잡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술람미 여인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
임은 나리꽃 밭에서 양을 치네.


이제 임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 되고, 나의 기쁨은 임의 기쁨이 됩니다. 임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되고, 나의 아픔은 임의 아픔이 됩니다. 사랑의 가장 깊은 차원은 바로 이 일치감을 경험하는 데서 열립니다. 하나님과의 틈 없는 일치를 경험하신 예수님은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요17:10) 하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봄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하는 우리 단가 <사철가>의 노랫말처럼 우리 인생의 봄은 아직 오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감격을 잃어버리고, 티없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도 우리 영혼에는 봄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임을 만나야 합니다. 임을 만날 기대와 소망과 애태움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술람미 여인처럼 임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나의 임이여
노루처럼 빨리 돌아와 주세요.


하나님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을 가지고,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내면서, 사랑을 안고 달려오시는 하나님을 애타게 기다린다면, 우리는 인생의 봄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괜히 기쁘고, 누구를 대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봄에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살아있음의 기쁨을 만끽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