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 소수자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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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15:3-7
설교일시 200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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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의 권리
눅15:3-7
(2003/3/23)


장성하면 쇠퇴하게 마련

춘추전국시대(BC 722∼BC221)에 수많은 전쟁을 보며 살았던 현인 노자는 전쟁에 대해서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한 예언자적 사상가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무위자연의 도로 임금을 보좌하는 사람은 무력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무력은 무력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군사를 일으켰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생겨나게 마련이고(師之所處, 荊棘生焉),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들게 된다(大軍之後, 必有凶年)고도 말합니다. 전쟁이 일어났던 자리는 폐허로 변하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고통을 겪게 됩니다.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은 듣기 좋은 수사일 뿐, 전쟁은 악입니다. 물론 부득이한 전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군사를 잘 쓰는 사람은 부득이 전쟁을 하긴 하지만(果而不得已) 구태여 강함을 취하려 하지 않고,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만물은 장성하면 반드시 쇠퇴하기 마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物壯則老). 강성한 것에 집착하는 것은 도에 벗어나는 것이고, 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是謂不道. 不道早已). 국제사회에서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미국을 보면서, 역사의 흐름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들이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네가 너희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렘45:5)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2:4)


마초들의 세상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에 위해를 가하고, 멸절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생명을 북돋고 살려내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우매한 존재입니다. 일단 힘이 생기면, 그 힘으로 힘없는 생명들을 억압하기 일쑤입니다. 우람한 근육을 은근히 자랑하는 마초(macho)들을 보면, 부러운 생각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철저히 육체로 변해버린 인간을 보는 것 같아서입니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마초 미국의 힘 자랑은 재앙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악마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의 사람됨은 약한 이들을 돕고, 그들과 공존할 줄 아는 데서 드러납니다. 참 사람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 즈음에 더욱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사람은 서있는 삶의 자리에 따라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사뭇 다른가 봅니다. 지구촌의 한쪽에는 죽음의 벌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여 공포에 질린 얼굴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전쟁의 불안요인이 사라져 주가가 반등했다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환한 얼굴이 있습니다. 나는 이게 참 가슴이 아픕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와 닿지 않는 이 무감각이 마치 인간세상의 황혼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이와 개구리

한 예언자가 왕을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성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양과 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은 작은 새끼 암양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양을 애지중지하면서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자기가 먹는 것을 함께 먹게 하고, 자기가 마시는 잔에서 마시게 했습니다. 잘 때도 자기 침상에서 함께 잤습니다. 그에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나그네 한 사람이 그 부자의 집에 들렀습니다. 부자는 그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자기 양을 잡을까 생각해보았지만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 끝에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서 자기에게 온 사람을 대접했습니다. 그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의 슬픔은 우리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하12장)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은 부자의 그 파렴치한 행위에 치를 떨면서 "이런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창백한 표정의 이야기꾼은 단호하고도 칼날같은 음성으로 선언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오."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예언자 나단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을 꾸짖기 위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여인을 범하고, 또 자기의 죄를 영원히 은폐하기 위해 그 남편 우리아까지 죽이고 만 다윗의 처사가 하나님의 눈 밖에 났던 것입니다. 우화에 나오는 개구리 이야기를 아시지요? 아이는 장난으로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 된다지 않습니까? 힘을 가진 자가 자기 힘의 행사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도 정욕에 사로잡힌 다윗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내 몫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몫을 넘볼 때가 많습니다. 특히 그런 경향은 힘있는 사람들에게 많습니다. 그것이 '정욕'이든 '물욕'이든 간에 말입니다. 우리도 개구리를 향해 돌을 던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에 가슴에 멍이 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은 다른 이의 눈물에 감응할 때 참으로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살라고 주신 소중한 이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록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99 : 1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주 어리석은 수학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에게는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입니다. 한 마리를 찾다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가 흩어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야기하는 불편 때문입니다. 어디로 함께 여행을 갔는데, 한 사람이 약속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모든 사람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거나 찾아 나섰던 경험은 아마 한두 번쯤 다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투덜거리며 그들을 찾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속을 끓이고, 나중에는 미운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돌아오는 길을 잃었다면, 혹은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서 99:1의 수학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항상 99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라면 어떨까요? 주인이 제발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겁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을 보면서 그때서야 '아, 장애인들이 살기에 서울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도시구나' 하고 느낍니다. 성적인 소수자들인 동성애자들을 우리는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노인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분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소극적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99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를 소홀히 하는 세상은 언제든 '아흔아홉'도 버릴 수 있는 사회라고 말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양을 강탈해 가는 세상은 미친 세상입니다. 비정상적인 세상입니다. 비인간적인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흐름을 뒤집어야 합니다.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어린양을 끝까지 찾아 나서는 정성이 한 공동체를, 그리고 한 사회를, 그리고 한 국가를 아름다운 공동체로 바꿉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성의 황혼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지금도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이라크를 향해 걷고 계십니다. 권리를 짓밟힌 채 숨죽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로 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를 향하고 계십니다.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어린양이 있는 곳 말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여 이 땅의 눈물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