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3. 새벽을 되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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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막1:32-39
설교일시 200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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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되찾으라
막1:32-39
(2003/3/30)


"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천재작가 이상의 <倦怠>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아득한 옛날 이야기를 듣는 양 봅니다. 우리는 참 분주합니다. 뭘 하느라고 이렇게도 바쁜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보고 좀 쉬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삶에 여백이 없습니다. 저는 이게 '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오죽 쉴 줄 모르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까지 하셨겠습니까?


믿음의 사람, 독립의 사람

어느 철학자(Martin Heidegger)는 타락한 실존의 모습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천박한 호기심입니다. 우리는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삽니다. 옛 속담에 "남이 장에 가니까 나도 씨오쟁이 지고 따라 나선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몰라도 좋을 정보를 수집하느라 우리는 참 분주합니다. 둘째는 중얼거림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사람됨이라는 데 우리는 허섭스레기(좋은 것을 고르고 난 뒤의 찌꺼기 물건)같은 말을 일쑤 쏟아내며 삽니다. 안 해도 좋을 말,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느라고 기력을 다 뺍니다. 셋째는 평균적 일상성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 남과 같아지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병입니다. 남이 가진 것은 나도 가져야 하는 병이지요. 머리를 물들이면 다 물들여야 하고, 가방이나 신발도 소위 말하는 '메이커' 제를 사야 합니다. 이게 다 뭐냐면 주체성의 몰각입니다.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 탓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독립한 사람'을 뜻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행진해 가는데, 유독 다른 방향으로 걷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라지요? 우리는 세상의 북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세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살아가는 그의 앞길에는 많은 함정과 덫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것을 잘 피하셨습니다. 독립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립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왔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장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때는 이미 왔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요16:32)


예수님의 자유 이면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홀로 있기에 더욱 함께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늘에만 매인 독립의 사람(帝之縣解, 장자3-9)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일어나 그를 대적한다 해도, 하늘 아버지가 함께 계심을 믿기에 그는 당당합니다. 이런 예수님은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기도입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하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주님은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막9:28, 29) 하셨습니다.

달의 변화에 따라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면서 바다가 푸르게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도 생명의 리듬을 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나아감'과 '물러감'의 통일이었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생명을 고치고, 살려내고, 북돋으시고, 때가 되면 물러나 하나님 앞에 서셨습니다. 활동이 기도를 삼키지 않았고, 기도가 활동을 가로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활동은 서로를 힘있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이 예수님은 당신에게 몰려오는 모든 사람들을 다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하지만 이른 새벽이면 외딴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이게 주님의 영적 풍요로움과 건강함의 근거가 아닐까요?


깨어나라!

돌아가신 어느 목사님은 건강의 비결을 묻는 제게 '나는 숨을 쉴 줄 알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숨 쉴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생명이란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다는 말씀일 겁니다. 우리는 생명의 리듬을 많이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채움이 있으면 비움이 있어야 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채움에만 열중할 뿐 비울 줄을 모릅니다. 나를 진실로 살리는 길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가운데 있다고 하더군요. 자신을 돌아볼 틈을 갖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 대한 집착의 구렁으로 떨어지기 쉽습니다. 집착이야말로 영혼의 깊은 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외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저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는 말로 듣습니다.


'낙심과 절망의 가수상태에서 벗어나라.'
'들숨과 날숨의 리듬을 되찾아라.'
'불평과 불만의 안개 속에서 벗어나 생명의 축제에 동참하여라.'


내일부터 우리는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엽니다. 석 주 간의 기도회를 통해 우리가 안고 있는 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졸린 눈을 비비면서, 하나님 앞에 그저 앉아 있기만 해도 우리는 진보할 것입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 일도 안 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이 두 마디였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누구시고, 나는 누구입니까?"

이 문제 하나를 풀기 위해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몸이 건강해지고, 가정이 평안하고, 사업이 잘되는 것은 둘째, 셋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느끼고, 나의 삶의 방향을 되짚어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복을 받았다 할 수 있습니다.


잠 도둑들

그 피곤한 아침 시간에 어떻게 일어나느냐고 걱정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일찍 주무십시오. 이건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새벽에 기도하려는 분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일찍 꺼야 합니다. 생활 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질병과 어둠은 잠을 자지 않는 데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스탠리 코렌이라는 분이 『잠 도둑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부제는 <누가 우리의 잠을 훔쳐갔나?>입니다. 그 책의 표지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이, 24시간 풀가동하는 시스템들이,
조금만 자야 성공한다고 말하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이,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는 통신망들이 우리를 이부자리 밖으로 내몬다.
아침마다 밤잠을 빼앗긴 사람들이 핏발선 눈을 비비며 커피를 들이킨다.
졸린 사람들이 도처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는 때로 엄청난 실수를 부르는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사람은 잠을 자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잠을 조금만 덜 자도 둔하고 멍청해지며
기운이 빠지고 화를 잘 내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잠을 적게 자는 것을 영웅시하고
잠이란 시간 낭비고 게으른 버릇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잠 빚을 늘렸다가는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저는 이 경고를 매우 두렵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밤을 지으신 까닭은 그 시간에는 자기의 존재를 돌아보고, 푹 쉬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우리는 밤을 잊어버린 문화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게 우리 문화를 관능적이고 폭력적이게 만듭니다. "진실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다"(시127:2). 히브리 시인의 노래입니다. 잠을 잘 줄 아는 사람이라야 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성경에는 예수님의 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소중한 그림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이 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예수님은 배 고물에 누워 편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풍랑조차도 깨울 수 없었던 그 깊은 잠이 예수님의 삶을 참답게 한 한 요소가 아닐까요? 어느 선생님은 '자라자라'는 말에는 '잔다'는 말과 '자란다'는 말이 담겨 있답니다. 잘 자야 자라지요? 이게 생명의 이치입니다. 깊이 잘 줄 아는 사람이라야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새벽, 주님과 만나는 시간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먼저 세상살이에 지쳐서, 사소한 일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좁아진 우리의 마음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면 '오늘'이 영원에 잇댄 하루가 됩니다. 어둠과 밝음이 뒤바뀌는 새벽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가슴 깊이 밝음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시간입니다. 잠을 통해 피곤을 다 털어버리고, 새벽의 청신한 공기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속에 영접할 때 우리 삶은 생동감을 얻게 됩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새벽에 하나님께 엎드렸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시간도 새벽(삼상3:3, 표준새번역 참고)이고,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엎드린 시간도 새벽이었습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시143:8)


새벽은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듣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께 여쭙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을 주님 앞에 들어올리면 주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새로운 힘과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야, 잘 잘 수 있고, 잘 자는 사람이라야 참에 이르게 됩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이 나아감과 물러감, 명상과 실천의 균형을 잃지 않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