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4. 허영심을 경계하라
설교자
본문 마6:1-4
설교일시 20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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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심을 경계하라
마6:1-4
(2003/4/6)

삶의 習氣

가끔 강연이나 설교 부탁을 받으면 제일 귀찮은 것이 강사의 경력을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신학교를 나왔고 지금 청파 교회 목사라고 하면, 다른 경력은 없냐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저서와 번역서를 묻습니다. 그것이 설교나 강연에 왜 꼭 필요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그를 이해하지 않고, 그의 학력과 경력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떤 분의 이력서를 보면 A4지로 몇 장이 됩니다. 학력, 경력, 시상 기록은 물론이고 어디에 연수 여행을 갔던 것까지 세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이력서를 보면 갑자기 다리가 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력서에서 '履'는 신발을 뜻하고 '歷'은 지낸다는 뜻이니까, 이력서란 결국 그가 걸어온 흔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력서에는 나쁜 기록은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패의 경험이랄지, 부끄러운 기억은 말끔히 지우고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자기의 밝은 면만을 기록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당연한 욕망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져서, 남이 우리를 칭찬하고 칭송하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의기소침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의 미성숙을 단적으로 드러내줍니다. 독립하지 못한 정신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좋은 일도 하면서 삽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도움을 받은 사람이 감사를 표하지 않으면 우리 속에서 불편한 마음이 고개를 듭니다. '정말 고맙다'고 하면 '별 말씀을 다하신다'고 하겠는데, 그럴 기회조차 안 주는 사람이 슬그머니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상처입은 마음을 보상받기 위해 감사할 줄 모르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꺼내고, 그러면서 은근히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때부터 선행은 악취가 나기 시작합니다.


과시욕구

예수님은 가장 좋은 것이 때로는 고황지질(膏 之疾, 병이 고황에 들어 생긴 낫기 어려운 병)이 될 수 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경건한 신앙인들이 꼭 해야 할 것으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자선과 기도와 금식이 그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고,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의 덕목이 본래의 지향점을 잃고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변질될 때, 사람의 영혼은 병들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기도,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긴 기도는 경건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오롯이 집중해야 함에도 자기의 금식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그의 금식은 고행으로 변질됩니다. 견디는 것이지요. 헌금을 드리면서도 굳이 자기가 십의 오조를 바쳤음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병든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태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십니다. 이 말은 보는 사람이 없으면 안 할 수도 있다는 말일 겁니다. 누가 보기 때문에 하는 일은 '즐거운 일'(work)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labour), 강요된 노동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노예의 노동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동을 경험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책에서 강제 노동의 어려움은, 그 고달픔과 끝없음 때문이 아니라 몽둥이 밑에서 의무적으로, 강제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깥 세상에서도 농부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하지만, 농부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일을 하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게 그 일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을 완전히 짓밟아 버리기를 원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노동을 부과하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에는 내적인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즉 자기 발생적인 기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의 기쁨은 항상 남의 평판에 기대 있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체의 행동에 대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이 말씀에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습니다. 이것은 삶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물론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살지만, 상 그 자체에 집중하지는 않습니다. 상만이 목적이라면 상을 얻기 위한 과정에는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은 삶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칭찬을 기대하면서 자기의 선행을 다른 이들에게 발설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상은 안개처럼 흩어지고 만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자신이 '시상자'인 동시에 '수상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랑과 과시의 노를 저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행실을 보고 계시고, 또 다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라의 여종이었던 하갈이 집에서 내쫓겨 광야를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셔서 위로해주시고 희망에 찬 미래를 약속해주셨습니다. 감격한 하갈은 그 하나님을 엘 로이, 즉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이웃과 가족은 물론 자기 마음속에서조차 떠벌리려는 자만심이나 집착이 없이 너그럽게 베풀라는 충고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받는 가장 큰 유혹은 남 앞에 나를 드러내고 싶고, 내가 한 일에 대해 과분할 정도로 칭찬 받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과,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탄은 허영심이라는 틈을 통해 우리 속에 깃듭니다. 뱀과 사탄은 우리가 인격을 다듬고, 덕을 크게 하는 일보다 허영과 간판에 더 큰 가치를 두라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영혼을 닦으라

이런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참 사람', '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흠모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런 이들이야말로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합니다. 노자는 "가장 큰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水善利萬物而不爭),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處衆人之所惡)" 했습니다.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손해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자기의 허영심과 싸워야 합니다. 허영심을 여읜 사람만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고후6:8b-10)


때로는 우리가 행하는 선행이 우리를 영적으로 타락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선행은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 속에 일고 있는 허영의 풍랑을 잔잔케 하십시오.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속에 잠들어 계신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 내면을 살피면서,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우리 내면에서 향기가 풍겨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선행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즐겁게 그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는 1인 1구좌 갖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나눔과 섬김을 통해 평화의 새 세상을 열기 원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그 작은 실천은 이 냉랭한 세상에 희망의 씨앗 한 줌을 뿌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딤전1:12)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