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5. 이 사람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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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21:6-11
설교일시 200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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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누구인가?
마21:6-11
(2003/4/13, 종려주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활기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T.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의 첫 부분입니다. 모든 생명이 깨어나는 4월을 시인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시의 제목으로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성의 황무지에 살면서 죽음에 더 매혹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숨결과 설렘이 가득 찬 4월은 견디기 어려운 달입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여

전 세계의 눈과 귀는 바그다드 거리를 질주하는 미군 장갑차와 탱크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이 끝나갑니다. 다행입니다. 더 많은 생명들이 다치지 않게 됐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지루한 전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 그 옷을 나눠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던 것처럼, 전쟁의 전리품을 나누는 문제 때문에 국제사회가 또 시끄럽습니다. 지금 이라크는 사람들 속에 갇혀 있던 '약탈자'가 깨어나 혼돈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마치 묵시록에 나오는 '무저갱'의 문이 열린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도 슬픈 그 광경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이익을 위해 신의나 바름을 지푸라기처럼 내다버리는 이 인간성의 '황무지'를 보면서 예레미야 애가가 떠올랐습니다.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
주님께서 분노하신 날에
내리신 이 슬픔,
내가 겪은 이러한 슬픔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애1:12)


이런 때 우리가 불러야 할 희망의 노래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소위 말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허구임을 아셨습니다. 로마가 자랑하는 평화는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획득한 '그들만의 평화'였을 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공포'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평화의 도성'이라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강자들의 힘 앞에 가위눌렸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져오실 새로운 나라를 바라보며 거리로 몰려나왔습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에 얹었고, 군중들은 겉옷과 생나무 가지를 길에 깔아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기쁨과 설렘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노래를 통해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들은 예수님께 다윗 왕의 이미지를 투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위대한 임금 말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곤경을 일시에 해결해주기를, 그리고 겪어왔던 고난의 세월을 충분히 보상해주기를 소망합니다. '공포와 충격' 작전으로 원수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이 세계사에 우뚝 서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평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얻는 평화는 또 다른 불화와 갈등의 시작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전쟁을 연상시키는 말을 타지 않으셨습니다.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가 연상시키는 것은 느림과 느긋함, 곧 평화입니다.


예수의 길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파탄의 씨앗을 봅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도성'이라는 예루살렘에 가져오는 평화는 원수들과 싸워 이김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라고 생각했던 사람조차 사랑으로 부둥켜안아 미움을 녹임으로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과 나눔과 사랑이 아니고는 어떠한 평화도 불가능함을 꿰뚫어보십니다. 강자의 횡포에 짓눌려 살아온 이들에게 그런 예수의 입장은 비겁한 처신으로 보였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무리들이, 며칠 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아이러니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가 깨졌을 때, 기대는 환멸로 바뀌고, 환멸은 또 다시 폭력으로 바뀐 것입니다. 폭력이 일쑤 좌절감의 표현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에 대한 희망과 긍지를 잃은 사람일수록 폭력에 매혹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주님은 누가 보더라도 어리석어 보이는 그 길을 택하셨을까요? 다른 길은 없었나요? 우리는 예수님이 마조히스트(masochist)가 아님을 압니다. 예수님도 살기를 원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십자가가 훤히 보이는 그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우리는 '폭력과 미움의 고리를 끊는 길'은 그 길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는 인간의 야만성과 고귀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이를 향한 군중들의 조롱과 웃음소리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심연을 봅니다. 하지만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기도에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일 수 있는지를 봅니다. 소설가 박완서님은 예수님의 수난이 왜 자신에게 소중한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신의 가장 당신다움은 결코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에 해당한 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당신의 가장 당신다움은 폭력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운명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나에겐 이 신비가 당신의 어떤 신비보다 아름답고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당신의 상처야말로 어느 누구하고도 헷갈릴 수 없는 당신만의 진리였습니다.
왜 당신을 믿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해도 당신을 믿게 되어 좋은 까닭은 마음이 아플 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를 수 있어서입니다." (박완서)


이 사람이 누구인가?

예루살렘 길가에 서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렬을 보면서 '이 사람이 누구냐?'고 서로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선지가 예수'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얼마나 고귀할 수 있는지를 온 몸으로 증언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찢긴 인류에게 연민과 마음 아픔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길임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온갖 고난을 겪으셨기에 우리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사건은 바로 이런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입니다. 이 덧없는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시고, 진리이고, 생명이심에 대한 확증입니다. 우리는 그 길로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어떠한 폭력과 힘 앞에서도 주눅들지 마십시오. 생명이 얼마나 존엄하고 고귀한 것인가를 삶으로 드러내십시오.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들이 머물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이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잔인한 봄에 생명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