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7. 휘장 너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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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16:6-10
설교일시 2003/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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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너머의 세계
행16:6-10
(2003/4/27)


비두니아의 길이 막힐 때

제2차 전도여행길에 오른 사도 바울은 이전에 설립했던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성도들의 믿음을 든든히 세워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난관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뜻밖의 난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것을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다"고 전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바울 자신의 건강 문제일 수도 있고, 그 지역의 정치적인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어떻게든 소아시아의 서북 지역으로 선교의 지평을 넓혀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 무시아에 이르러, 소아시아의 서북 지역인 비두니아로 가려 했지만 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다"고 전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계획이 좌절되는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낙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아시아의 서쪽 끝인 드로아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가 세웠던 모든 계획을 접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에게 전도의 문을 막았던 성령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는, 유럽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의 초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나의 계획이 어그러지거나, 가로막힐 때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주님께 여쭈어 봅니다. '저에게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하십니까?' 그렇게 마음을 모으다 보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도 떠오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두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언제나 옳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우리 시대의 마게도냐 사람

주님은 바울을 마게도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그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시대의 마게도냐인, 곧 복음과 만나야 할 이들은 누구일까요? 어쩌면 그들은 살아있음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자기 존엄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제게는 주류 사회에서 밀려나 자꾸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노인들, 도시 빈민들, 삶의 희망을 찾기 어려운 농어민들, 국제 이주 노동자들, 소년소녀 가장들, 동성애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런가 하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도 떠오릅니다. 소비사회의 제물이 되어 인생의 목표가 마치 소유에 있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누가 이 지겨운 욕망으로부터 나를 구해달라'고 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살아있음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세상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또 다른 마게도냐 사람이 되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국제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는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사람들, 지속적인 학대와 모욕을 겪으며 사는 사람들, 인생에 대한 어떤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꿈을 가질 수도 없는 사람들, 그들은 또 다른 우리 시대의 마게도냐인입니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가족과 친척들이 죽는 것만 봐왔다. 기뻤던 순간은 단 한번도 없다. 내가 크면 이스라엘 군인들을 죽이고 나도 죽어버릴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10살 소년의 이 말은 인간의 인간됨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밤이면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는 뜻으로 하늘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 올리는 사람들이 이 지구촌 한 편에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장애인,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장

저는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마게도냐인으로 장애인들을 꼽고 싶습니다. 장애인이라는 말 자체 속에 이미 차별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기에 그다지 적절한 단어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려 하지 않지만, 왠지 우리는 장애인들 앞에서 자연스러움을 잃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지요? 어쩌면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또 그들이 야기하는 불편함이 싫어서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현실입니다. 장애인들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장애인이 될 가능성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도 존엄한 존재로 인정해달라고, 인생에 대한 꿈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세상의 한복판에서 주눅들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하나님의 실패작인가요? 장애는 재앙 그 자체인가요?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인종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부정하고 싶겠지요?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백인이라고 해서 흑인보다 생명의 값이 더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장애인이라고 해서 장애인보다 생명의 값이 더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저 나름대로의 선물을 다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생명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듯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태어난 모든 존재들은 다른 이에게 선물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선물인 것일까요?

먼저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던 좁은 세계를 벗어나, 미처 가보지 않았던 신세계를 보도록 말입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던 마사와 존 베크 부부는 다운 증후군에 걸린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들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아담'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담이 그 가정에 오면서 마사와 존은 자기들의 삶을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공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은 전혀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서 사람들이 공격적으로 성취하려고 하는 것들이 오히려 절망의 몸부림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지나쳐버리던 일들 속에 깃든 신비와 아름다움을 알아보았습니다. 삶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함임을 몸으로 확연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사 베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담과 함께 살고 아담을 사랑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담은 나에게 사물 자체를 보고, 무자비하고 흔히 무감각한 세상이 그것에 갖다붙인 가치를 보지 말라고 가르쳤다. 아담의 엄마로서 나는 그가 흉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덜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우둔하게 보인다고 해서 덜 지혜로운 것이 아니며, 가치없게 보인다고 해서 덜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이고 당신도 마찬가지다. 우리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마사 베크, 『아담을 기다리며』334-5쪽)


장애인들은 또한 미친 듯이 질주하는 시간 속에서 숨돌릴 여유조차 없이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속도를 늦추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지닌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속도에 맞춰 우리 삶의 속도를 조율해야 합니다. 티크 낫 한 스님이 오셔서 걷기 명상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만, 걷기 명상이 뭐 따로 있겠습니까? 사랑의 마음으로 장애인들과 함께 걷고, 노인들 곁에서 함께 걸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조급증이 사라지면서, 우리의 존재가 고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장애인들과 함께 하려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 곁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 살려 할 때,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주님은 관념적인 실체가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존재로 우리 앞에 다가오십니다. 테레사 수녀는 병든 그리스도를 닦아 드리고, 헐벗은 그리스도에게 옷을 입혀 드릴 수 있는 거룩한 소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에게로 통하는 문인 것입니다.


휘장 너머로 나아가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에 드리워져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 체제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아름다운 생명의 열매도 하나도 맺지 못하는 굳어버린 종교가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찢어진 휘장은 우리를 그 너머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세계를 벗어나 그 너머의 세계로 나아갈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아 속에 드리운 휘장은 사람들을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피부색으로 가르고, 지역으로 가르고, 학벌로 가르고, 소득으로 가르고, 직업으로, 성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갈라놓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몸으로 그 휘장을 철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휘장 너머의 세계로 부르고 계십니다. 휘장 너머의 세계는 위험한 곳도 불쾌한 곳도 아닙니다. 오히려 풍요로운 삶의 가능성이 있는 곳입니다. 휘장 너머에서 우리를 부르는 이 시대의 마게도냐 사람들, 그들의 부름에 응답할 때 우리 삶은 넓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애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갈 때,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의 말을 들어줄 때,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을 때 우리는 참 사람이신 예수님의 길 위에 확고히 서게 될 것입니다. 비두니아의 길이 막혔을 때 바울은 상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자아에 드리운 차별의 휘장을 찢고, 휘장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 풍요로운 생을 즐길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