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8. 우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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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골1:24-29
설교일시 20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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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골1:24-29
(2003/5/4, 교회 설립 감사 예배)


편안함의 욕구를 멀리하라

엊그제 집에서 나와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목례를 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배기가스가 코끝으로 훅 끼쳐왔습니다. 기분이 좀 상하더군요. 그래서 속으로 중얼거렸어요. '물건을 배달하는 것도 아닌데, 가까운 동네 일을 보러 다니면서도 꼭 오토바이를 타야 되나?' 하기야 승용차에 의존하다 보면 가까운 거리도 차를 타고 다니게 된다지요?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혼자 다짐했어요. '할 수 있는 한 몸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말자. 힘들어도 많이 걷고, 많이 움직이자. 잘 때가 아니면 눕지 말자.' 다짐은 그렇게 했지만 늘 그럴 자신은 없어요. 사실 몸에 밴 게으름의 습기는 떨쳐내기 참 어려워요.

편안함을 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일 거예요. 하지만 편안함은 우리 영혼의 건강을 해칠 때가 많아요. 해안에서 내륙 깊은 곳으로 물고기를 싱싱하게 운송하려면, 수족관 속에 문어를 몇 마리 넣어야 한다고 하지요? 그래야 물고기들이 문어를 피해 달아나느라고 계속 움직여서 싱싱하게 유지된대요. 그래봤자 먹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요. 바울 사도는 마치 편안함을 피해 다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계속해서 불편함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그는 어느 한 군데에 안주하지 않았어요. 복음에 대한 열정이 그를 바람처럼 휘몰아갔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그가 가장 편안했던 때는 감옥에 있을 때뿐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본문에 나오는 그의 고백은 마치 마조히스트(masochist)의 선언처럼 보여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


하지만 바울은 괴로움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어떤 괴로움도 불사할만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이만하면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자신을 남김없이 불사를만한 일을 찾은 사람은 참 행복할 거예요. 바울에게 그것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께 돌아온 사람들의 믿음을 든든히 세우고, 주님의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어떤 시련이라도 몸으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

바울의 그 열정의 뿌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는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그리고 세상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확연하게 알게 된 것이지요. 바울은 그래서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이라고 말했어요. 달리 말하자면 세상은 예수라는 존재를 향해 달려왔고, 또 지금도 그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그리스도야말로 인류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리스도는 피안의 세계 저 너머에 계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와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시면서(27절)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어주시는 분이세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산다고 고백했어요. 그분을 닮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꿈을 이루는 것이 자기 인생의 목표라는 말입니다. 물론 아직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목표에 당도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가야 할 길은 분명히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길을 알고 사는 사람, 그래서 그 길에 접어든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예컨대 우리가 부산에 가려 할 때, 그 길에 접어드는 순간 부산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와있잖아요? 그처럼 그리스도의 길에 접어든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물론 바울은 자신이 아직도 가야 할 목표에 이르지 못했음을 잘 알고 있어요. 그는 길 위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는 젠체하는 태도로 사람들을 억압하지 않아요. 속담에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못보셨겠지만 목사들 가운데는 엉덩이에 뿔난 분들이 꽤 있어요. 완전한 사람인 척, 다 아는 척 할 때마다 그 뿔이 자란 대요. 그런데 바울 사도는 항상 자기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살았어요. 그러니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서 으스댈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도 그는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그는 각 사람을 가르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도록(28b) 돕고 싶다고 말해요. 완성된 자로서가 아닐, 이미 도달한 자로서가 아니라, 그 길 위에 서있는 사람으로서 말이지요. 어쩌면 그것이 자기 자신을 굳게 세우는 길이었는지도 몰라요. 우리는 가르치면서 더 많이 배우니까요.

물론 바울이 말하는 '완전함'은 도덕적으로 티도 흠도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바울 사도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했어요. 그게 인간의 실상이지요. 하지만 바울 사도가 말하는 완전함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라는 중심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것을 뜻해요. 그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롬14:8)이라고 고백했어요. 성도들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완전한 사람'이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있는 사람이란 말이 되겠네요.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은 참 많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성도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듯 싶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 밖에서 방황할 때가 많기 때문일 거예요.


오늘 우리의 현실

그리스도 밖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희망의 표징이 되지 못하고 있어요. 한신대 신학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 사회는 개신교를 이기적인 집단으로 보고 있다고 하더군요. 또 주변에 품위와 자격이 없는 성직자가 많다고 응답한 수도 52.8%에 달한 대요. 현재 비종교인 가운데 과거 개신교인이었던 사람이 56%나 됐는데, 그들 가운데 개신교를 다시 선택하겠다는 응답자는 21.5%에 불과했습니다. 비종교인에게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 대해 물어본 결과, 교회는 7%, 시민단체 12.6%, 사할 10.8%, 정부기관 10%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쟁이'라고 부릅니다. 약간 멸시하는 태도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예수 믿는 일에 있어서 정말 '장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장이'라는 말은 어떤 일정한 직업이나 기술에 전념하여 그것에 정통한 사람, 곧 匠人을 가리키는 말이라지요? 그 사람이 '장이'인지 여부는 그가 장인정신을 가졌는가에서 판가름난대요. 장인정신이란 그가 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소명의식을 갖고 그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그 일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장이'는 자기의 삶의 모든 순간 속에 예수의 정신을 불어넣는 사람이 되겠네요. 여러분, 그렇게 살고 계신가요? 군대에 있을 때 우리는 '군인의 길'이라는 신조를 외워야 했어요.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어느 병사의 관물대에 적혀있던 말은 잊히지 않아요. '군인의 길은 비포장도로다.' 이 짧은 말속에 군 생활의 애환이 다 담겨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혹시 여러분, 예수'장이'의 길은 '제정신이 아닌 길'이라고 복창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물론 예수정신으로 세상을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야말로 비포장도로예요.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금년도에 거창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선생님들과 학생들 학부모들이 다 울었대요. 한 학생의 졸업생 답사 때문이었대요. 그 일부를 읽어 드릴께요.


"거고인 건축가가 세운 다리는 무너지지 않고, 거고인 농부가 키운 작물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며, 거고인 의사는 사람의 목숨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거고인 판사가 내린 판결은 믿을 수 있고, 거고인 직공이 만든 옷은 단추가 잘 떨어지지 않으며, 거고인 선생님에게는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다. 거고인 기자는 거짓을 전하지 않으며, 거고인 역사가는 그 무엇보다 진실을 목말라 한다. 그래서 세상은 거고를 빛이요 소금이라고 한다."


저는 이것을 그저 글로 보았을 뿐이지만 역시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교회 설립 74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저는 '거고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자리에 '청파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파'라는 교회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지고, 청파교인이 있는 곳에 일치가 있고, 사랑의 온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의 모습

차츰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려는 그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어요. 바울 사도께서도 자기는 아직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했고, 다만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아직도 길 위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더 노력해야 해요.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될까요? 불가능해요. 주님이 도와주셔야 해요. 바울 사도도 말씀하셨어요.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29)


사도께서도 자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 있기에, 완전한 사람이 되려는 목표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어요. 우리 힘으로 하려다 보면 쉽게 지치고 낙심하게 되지요. 하지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지 않고 그 목표를 향하도록 때로는 격려하고, 힘을 북돋고, 깨우쳐주시고, 때로는 꾸짖기도 하세요. 그런데 한가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이것이에요.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우리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우리 존재가 자유로워지지 않는 까닭이 뭔지 아세요? 우리 힘을 부분적으로만 사용하기 때문이에요. 힘을 다해야 힘이 자라요. 성도는 자매와 형제를 일으켜 세워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희망의 표징이 될 거예요. 몸으로 헌신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건강해진대요.

아까 말씀드린 통계를 보면 참 속상해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눈은 예수님의 눈을 닮았어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꼭 있어야 할 내실이 없다는 뼈아픈 지적을 받고 있는 셈이에요. 교회 안에서조차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이 예수정신을 삼켜버리고 말았어요. 저는 우리 교회가 내실이 있는 교회,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예수정신이 지배하는 교회, 그래서 어려움을 사서하는 교회,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 때문에 눈물의 기도가 끊이지 않는 기도,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보이는 교회, 다름을 용납할 줄 아는 교회로 성장해가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은 저만의 소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그리고 주님의 소망일 거예요. 교회의 아름다운 미래는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 각자에게 달려 있어요. 한 사람 한 사람 자기에게 주신 은사로 성도들을 섬긴다면, 그것도 힘을 다하여 그리한다면 우리 교회는 희망의 샘물이 흘러 넘치는 물댄 동산이 될 것입니다. 이 꿈을 가지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