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1. 어울림 속에 계신 하나님
설교자
본문 스가랴8:3-8
설교일시 200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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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 속에 계신 하나님
스가랴 8:3-8
(2003/5/25, 한마음 체육대회)


살피꽃밭 풍경

절기상으로 보면 우리는 지금 小滿을 지나 芒種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빛나는 신록의 계절인 소만은 '작은 가득 참', 혹은 '작은 만족'을 뜻합니다. 지지고 볶는 인간사에서 잠시 벗어나 녹색으로 충만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참 즐거운 일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의 눈과 귀가 시원해지고, 답답했던 마음에 초록 물이 곱게 들고, 파랑 바람이 일렁이기를 빕니다. 저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의 살피꽃밭을 살피는 재미를 붙였습니다. 자태를 뽐내는 화려한 꽃은 없지만 수줍은 듯 곱게 핀 양달개비와, 선비처럼 단아한 자태의 붓꽃과 아침저녁으로 눈맞춤하고, 이제 얼마 후면 피어날 소국, 참나리, 접시꽃을 기다리면서 제법 축복의 기도도 올립니다. 그리고 빨갛게 익은 딸기를 바라보노라면, 철든 자식을 바라보는 것 같아 흐뭇합니다. 이제 6월이 되면 산딸나무에도 하얀색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식물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세상이 하도 시끄러워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 각 부문에서 터져나오는 갈등의 파열음이 이제는 아주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사회 발전을 위해 거쳐가야 할 과정임을 모르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 없이 너무 거칠게 밀어붙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시인 도종환도 비슷한 마음이었나 봅니다.


개나리꽃 참나리꽃 조팝나무 산철쭉
잘나고 못난 꽃들이 아니라
얼굴빛과 향기가 서로 다른 꽃들이 모여
동산을 환하게 가꿉니다

소나무 전나무 오리나무 가문비나무
저만 홀로 우뚝 솟은 나무가 아니라
특별히 잘난 데 없는 그만그만한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고 산을 만듭니다
―「덕암리」부분


저마다 다른 모양과 빛깔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이 어우러져 동산을 환하게 가꾸고,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산을 이룹니다. 이게 세상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경쟁도 하지만, 대개는 서로를 위한 편안한 배경이 되어 주고, 함께 숲을 이루어가는 온갖 것들. 그 속에서 시인은 생명의 실상을 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당신의 뜻에 따라 조화롭게 이루어진 세상을 보시면서 참 좋아하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인간의 지나친 탐욕으로 말미암아 깨지고 만 '생명의 조화로움'을 회복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제 가슴에는 '어울림'이란 말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삼보일배 행렬이 가리키는 세상

새만금 갯벌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三步一拜의 행렬이 마침내 서울에 입성했습니다.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 이희운 목사, 김경일 교무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 행렬에 가담했습니다. 그들은 세 걸음을 내딛고 한 번 절하면서, 우리들 속에 있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제거되기를 빌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생명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세상을 바라보며 목숨을 건 고행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 행렬을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고, 그 행렬에 가담하는 이들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기도를 드리려고 눈을 감을 때마다 그 행렬이 제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저절로 그들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이 내다보고 있는 세상의 꿈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종교의 차이를 핑계로 그들이 하는 일을 폄하한다면 그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삼보일배의 행렬이나, 그 일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는 소중한 생명가치입니다. 끝없는 인간의 탐욕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조화로운 세상,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망가뜨렸습니다. 주님은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는 세상을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민35:34)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머물러 살고 있는 땅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형편은 어떻습니까? 땅도 하늘도 물도 자연도 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혹은 다른 피조물들과 어울려 살기를 포기하는 순간, 하나님을 추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땅에서 하나님이 떠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이 모양이지요. 이제 정말 시급한 일은 하나님을 우리들 가운데 모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경제를 살리거나, 정치력을 복원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 근본이라면 다른 문제는 지엽말단입니다. 근본이 바로 서야 다른 일들도 바로 되지 않겠습니까.


'한가로이', '어울려서'

선지자 스가랴는 황폐했던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거기 머무시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신 예루살렘의 모습을 스가랴는 매우 소박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남녀 노인들이 한가로이 앉아서 쉬고, 어울려서 노는 소년 소녀들이 도성 광장에 넘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평범한 풍경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가운데서 '한가로이'라는 단어와 '어울려서'라는 단어가 사무치게 좋습니다. 우리 마음이 뭔가에 쫓기듯 분주하지 않은 세상,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노는 데 걸림이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은 그런 세상을 누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는데, 어린이들의 특색이 잘 어울려 노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우리가 한데 어울려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짐들을 다 내려놓고 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웃음과 신명을 길어 올려, 서로의 울울한 가슴에 시원하게 쏟아 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어울림을 통해 우리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온갖 피조물들과도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 어울림 속에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어울림 속에 오시는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면서,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 삶이 새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