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2. 겸손을 길로 삼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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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잠언16:18-20
설교일시 200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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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을 길로 삼으라
잠16:18-20
(2003/6/1)


갈등(葛藤) 사회

"요즘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어느 정치인의 말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 우리 현실이 그다지 행복할 것도 없고,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것 아닌가 싶어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세요. 대개 삶의 피곤기가 짙게 배어 있어요. 함석헌 선생님 말씀처럼 아침 바람처럼 맑은 얼굴, 저녁 하늘처럼 영광스러운 얼굴, 굳게 찡그린 바위의 가슴을 터치고 웃는 꽃 같은 얼굴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제 얼굴도 뭐 만만치는 않지만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들리는 소식은 가슴에 울화를 일으키기 일쑤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사람들의 '말살이'가 독해졌어요.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욕설과 원색적인 비난이 많아요. 온유하고 겸손한 말투는 찾아보기 어려워요. 익명성 뒤에 숨어서 자기 감정의 찌꺼기들을 마구 쏟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요즘은 여러 이해집단들이 정면충돌하면서 내는 굉음 때문에 귀가 멍해질 정도예요. 물론 사회적 갈등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요. 사람들의 '모듬살이'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우후죽순처럼 분출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나 병리학적 현상이 아니에요. 오랫동안 잠복해있던 갈등의 요인들이 때를 만나 쏟아져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거예요. 문제는 그 갈등이 그 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던 불균형을 해소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일에 디딤돌이 될 수 있나, 없나 이지요.

이러한 조정 과정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거나 파괴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해요. '갈등葛藤'은 본시 '칡'과 '등나무'를 뜻하는 말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불화하고 반목하는 사람들이 칡과 등나무처럼 감정적으로 쉽게 얽혀 들어가고, 빠르게 증식되는 것을 보면서 '갈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옛 사람들의 통찰이 참 놀라워요. 우리 사회의 갈등이 '사회적 균형'이라는 옥동자를 낳으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못할까봐 걱정입니다. 갈등 속에서도 서로의 살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염려스러워요. 무엇보다도 나는 남과 다르다는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해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8)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18:27)


교만한 마음은 그 자체로 불행입니다. 1) 먼저 교만은 자기를 기만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 하고 말씀하셨어요. 교만한 사람의 눈이 자기 자신을 향하는 법은 별로 없어요. 항상 그의 눈길은 남의 허물을 찾기에 분주하지요. 어느 분이 그러시더군요.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신다면 구원받을 사람 하나도 없다." 참 두려운 이야기 아닌가요? 2) 교만한 마음의 두 번째 불행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머무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힘의 근원이신 분을 떠난 삶은 곧 시들해질 수밖에 없어요. 3) 교만한 마음의 세 번째 불행은 생명을 낳지 못하다는 사실이에요.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이기심의 먼지만 날리는 인간성의 황무지로 변하게 마련이에요. 그러니 생명의 하나님께서 그를 좋아하실 리 없지요.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고, 욕이 뒤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눈이 교만한 자를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에요.


아름다움을 해방시키는 마스터 키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꾸만 우리 속에서 돋아나는 교만의 싹을 도려내면서 겸손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아니겠어요?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어요. 겸손의 본을 보이신 거지요. 사람은 본래 겸손하기가 쉽지 않아요. '네가 신과 같이 되리라' 하는 유혹에 넘어간 게 인류의 조상이에요. 그 피가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서라도 자꾸만 높이 뜨려는 마음을 붙잡아 낮춰야 해요.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19)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自己否認'이었어요. 그런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셨어요. 주님을 따라 겸손의 길을 걸으려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자기에 대해서 말을 아끼는 게 대단히 중요해요. 우리는 자기를 드러내고, 표현하려는 욕구가 많아요. 그래서 다른 이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지요. 할 말은 많지만 들어야 할 말은 별로 없는 것처럼 처신해요. 하지만 그건 우리 영성 발전에 아무 도움이 안 돼요. 말을 헤프게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말은 더욱 아껴야 해요. 비록 젠체하는 태도로 하는 말은 아니라 해도, 말속에서 허영심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

다음에는 누구를 대하든지 그에게서 칭찬할만한 점을 찾아야 해요. 세상에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성격이 괴퍅하고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요소가 있게 마련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들 속에 갇혀 있는 그 아름다운 요소를 해방시켜줄 책임이 있어요. 그 굳게 잠긴 아름다움을 해방시키는 마스터키(master key)는 '사랑'과 '존중'이에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존중해주는 데 끝까지 마음을 닫고 있을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사람은 항상 우리가 그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어요. '제까짓 게 뭔데', '난 너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아', '네 멋대로 해라.' 저는 요즘 상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가능성의 문을 닫는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위로 올라간다

저는 온갖 갈등이 어지럽게 분출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사람들에게 가져가야 할 소중한 선물이 있다고 생각해요. 얼굴에 미소를 짓고 걷기, 거칠고 삭막한 말은 삼가고 친절하고 따뜻한 말 나누기, 먼저 인사하기(엘리베이터를 타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시선을 둘 곳이 없으니까 대개 바라보는 것이 있지요. 정격하중 1,100㎏, 적정인원 16명. 층수가 높아지면 1,100을 16으로 나누면서 한 사람의 평균체중이 얼마나 되나를 계산하지요. 차라리 따뜻한 목례라도 나누면 좋을 텐데요). 몸과 마음에서 힘 빼기. 따지고 보면 이게 다 '힘 빼기'하고 연관이 되는군요. 얼굴에서 힘을 빼야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말에서 힘을 빼야 따뜻한 말이 되니 말입니다. 힘을 빼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집착을 자꾸 버려야 해요. 성도는 복의 매개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남을 복되게 하는 것을 자기의 복으로 삼은 사람들이란 말이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부활의 생명을 덧입혀주셨어요.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老子는 道德經 76章에서 말합니다. "나무가 강하기만 하면 꺾인다. 나무에서 딱딱하고 커다란 것은 밑으로 내려가기 마련이고,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위로 올라가게 마련이다. 木强則折, 强大處下, 柔弱處上") 교만한 마음은 우리를 자꾸만 땅에 속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만이 하늘을 향해 오르는 마음입니다. 성도는 겸손을 길로 삼은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교만하고 굳은 마음을 날마다 말씀의 칼날로 도려내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속살이 차 오를 때까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