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3. 아름다운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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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왕하2:8-14
설교일시 200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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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계승
왕하2:8-14
(2003/6/8, 성령강림주일)


바톤 터치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家業'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습니다. 부모가 하던 일을 자식이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키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대를 이어가면서 하는 우동집, 베이커리, 목공소……. 그들에게 가업은 그저 생계를 잇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들은 '일'을 '괴로운 노동'이 아니라 소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전통과 역사를 만듭니다. 세월이 갈수록 향기롭게 익어가는 포도주처럼 사람들은 그들이 있어 행복해집니다. 그들은 마치 모든 것이 분주하게만 돌아가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고향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푸근함을 안겨줍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대물림이 잘 이루어지더군요. 그런데 그게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아버지 목사님이 은퇴하면서 아들 목사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 말입니다. 세상은 그런 대물림에 '세습'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줍니다. 교회 세습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영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마쳤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러 가지 핑계가 있겠지만, 그들은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어버리고 잊었거나, 짐짓 무시하는 겁니다. 내가 아니면, 혹은 나의 방식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인생은 릴레이 경주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주자가 자기에게 정해진 구간을 다 달리면 바톤을 다른 주자에게 넘겨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이치이고, 역사의 이치입니다. 그것을 거역하면 추한 꼴을 보이게 됩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듯 깨끗이 물러설 줄 알 때 사람은 아름다워 보입니다. 선불교 전통에서도 한 스님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우면, 진리를 깨달은 제자에게 衣鉢을 넘겨줌으로써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 자기의 역할을 넘겨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입었던 두루마기를 엘리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일을 계승하도록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몇 가지 예를 보았습니다만 우리는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은 혈통으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했을 때 여호수아는 '지혜의 신'으로 충만해졌습니다(신34:9).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구한 것은 갑절의 영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불고 싶은 곳으로 부는 바람처럼 성령은 어느 누구에게도 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성령에 충만한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잠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영감을 갑절이나

먼저 엘리사가 엘리야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었던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그에게는 사모함이 있습니다. 熱心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여러 번 엘리사를 떠나 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스승이 가는 곳마다 따라갑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 강가로. 다른 제자들은 스승의 떠남을 예상하면서도 그를 따라 나서지는 않지만, 엘리사는 스승의 정수를 얻기 전에는 결코 스승을 보내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마침내 스승은 제자에게 묻습니다.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이 문답 속에 위대한 혼이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한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엘리사는 자기가 구해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스승보다 못한 제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스승을 욕보이는 일입니다. 靑出於藍(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이라지 않습니까? 엘리야는 '내가 사자 한 마리를 키웠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했을 겁니다. 하지만 영감을 주는 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매개자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두 사람이 길을 가며 이런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불수레와 불말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사는 큰 소리로 스승을 부릅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당연합니다. 엘리야가 그의 정신을 낳아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엘리사는 스승을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군인이나 말의 수, 첨단 무기가 한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있는 정신이 나라를 지킵니다. 정신이 무너지고 나면 첨단 무기도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엘리사는 위대한 혼 엘리야의 떠남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옷을 둘로 찢습니다. 이것을 저는 자기를 깨뜨리는 행위로 봅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그 여인처럼 엘리사는 자아를 깨뜨립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옷을 집어듭니다. 아름다운 계승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엘리사는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치면서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십니까?" 하고 외칩니다. 그러자 물이 갈라져 뭍을 걷듯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하나님이 엘리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이제 엘리사는 독립적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자기 발로 일어선 정신적 의미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말입니다.


힘찬 새 삶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 곧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공감'(sympathy)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웃들의 사정을 알아차리고, 피조물의 고통 때문에 마음 아파합니다. 그의 삶의 모토가 바뀝니다. '나 좋을 대로'에서 '남 좋을 대로'로 말입니다. 그는 또한 피조물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면서 여전히 자기의 욕심이나,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어떤 외적인 현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마24:24). 바울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한다'(고전10:24)고 말합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생동감 넘치게 살아갑니다. 성령은 마치 영혼의 토네이도 같아서, 우리 삶을 뿌리로부터 흔들어놓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한 제자들은 골방의 빗장을 열고 뛰쳐나가 세상 사람들 앞에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싫어해서 버린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외쳤습니다. 회당에 잡혀가 매를 맞고 온갖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힘, 곧 에너지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에너지가 넘칩니다. 물론 외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내적인 에너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저는 존경하는 한 후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얼굴은 농부처럼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얼굴빛은 환했습니다. 그는 지금 양평의 어느 산비탈에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넓은 길을 마다하고 좁은 길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이번에 땅을 구입하고 교회 신축을 위해 측량을 했는데, 매도자가 이야기하던 곳에서 수 십 미터쯤 비켜난 곳이더랍니다. 그곳은 경사가 너무 급해서 건물을 짓기에 적절치 않았어요.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낫지만, 기도 중에 문득 한 깨달음이 왔습니다. '척박한 곳을 복이 넘치는 땅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쓸모 없는 땅으로 여겨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 땅을 아름답게 가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수로를 깊이 파고, 바위를 잘 배치해서 산에서 사람들의 논밭으로 쏟아져 내리던 물줄기의 흐름을 돌려놓았고, 그곳의 자연환경과 잘 조화되는 건물을 건축했습니다. 저는 그의 모습에서 성령에 충만한 한 아름다운 존재를 보았습니다.

엘리야의 영감을 물려받은 엘리사가 처음으로 한 일도 쓴 물을 솟구치는 샘의 근원을 고쳐 단 물로 바꾼 일이었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바로 이런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절망을 희망을 바꾸고, 인간성의 불모지를 따뜻한 인정이 꽃처럼 피어나는 인간성의 옥토로 바꿉니다.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정말 잘 산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초대인지요? 저는 찬송가 378장 3절을 부를 때마다 감격에 북받칩니다.


천하고 무능한 나에게도
귀중한 직분을 맡기셨다
그 은혜 고맙고 고마워라
이 생명 바쳐서 충성하리


성령 강림절기가 시작되는 오늘 이후,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의 신바람을 탄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