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4. 어디로 달려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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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디도서2:11-15
설교일시 200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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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달려가는가?
디도서 2:11-15
(2003/6/15)


어디 가세요?

이따금 길에서 마주치는 교우들은 제게 "어디 가세요?" 하고 묻곤 합니다. 대개는 대답을 얼버무리지요. '서점에 가요', '심방 가요', '친구 만나러 가요', '그냥 걷는 거예요'…. 그러면 대개 더는 묻지 않습니다. 어디 가냐는 물음은 꼭 대답을 듣기 위해 하는 질문이 아니라 그저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에서 마주친 어느 교우가 '어디 가냐'고 말을 건네왔을 때 그 인사말이 제 가슴에 와 깊이 박혔습니다. 교우와 헤어진 후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말 알고 사는 것인가? 어느 순간에도 그곳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사로잡혔습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빨리 걷는 이도 있고, 천천히 걷는 이도 있지만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물론 아는 이를 붙잡고 '어디 가냐?'고 물으면 그는 자기의 목적지를 말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장소 말고, 우리가 온 몸과 마음을 기울여 이르고자 하는 인생의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사는 것일까요? 어느 시인은 '왜 사냐건 웃지요' 하고 싱겁게 말했습니다만, 정말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뤄야 할 생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돈 벌고, 즐기는 것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품부(稟賦)받아 살고 있는 우리의 인간됨의 목표가 뭐냐는 겁니다. 너무 거창한 질문인가요? 권태롭다는 표정이 역력하시네요. '당장 먹고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뭐 그런 문제로 골치를 썩어. 그런 물음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묻는 거지.' 정말 그런가요? 그렇다면 인생은 비극입니다.


우리 존재의 목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우리 존재의 목표로 삼았다는 말일 겁니다. 예수님은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안다"(요8:14)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생을 그렇게도 깨끗하고 당당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 전체를 걸고 해야 할 일을 아셨고, 또 분명한 지향점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뜻을 늘 희생시켰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이 당신을 통해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세상 사람들의 환호성과 찬탄에 매혹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향한 세상의 비난, 모략, 제자들의 배신, 절대적인 고독,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그를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단 것은 좋고 쓴 것은 싫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을 깨닫고 나면 그 쓴 것 단 것이 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평안합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삶의 계기들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로 삼는 사람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 존재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어디 가세요?' 하고 누가 물을 때, 입으로는 어딘가를 말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예, 예수님께로 갑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아마도 힘있는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날마다 새롭게 체험되어야 할 생명

예수님께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날마다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과 작별해야 합니다(12). 감각적인 만족을 찾아 헤매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값진 시간을 어슬렁거리고 먹고 마시고 떠드는 일에 탕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할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합니다.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6:21) 하셨습니다. 새차를 사고 나면 어디에 있든 그 차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잖아요? 우리가 보물이라고 여기는 곳에 우리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고, 마음이 머문다는 말은 시간을 들인다는 말입니다. 한 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가 늘 지친 채 살아가는 것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힘이 우리 속에 차오르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말 그럴까?' 하고 의아해하시는군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영적인 힘은 버림에서 옵니다. 하루에 한 20분씩 두 차례씩만이라도 일상의 흐름을 끊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해 보십시오. 세상을 이길 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뭍에 올라가 보니 숯불이 피워져 있고 빵과 생선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미 준비된 것이 넉넉한 데 왜 하필 방금 잡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실까요? 함석헌 선생님은 이것을 "오늘에는 오늘의 체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맨 첨부터 있는 영원한 진리지만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체험되어야 생명"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상(床)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식탁에 우리의 경험을 가지고 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선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

예수님은 철저한 자기 비움과 희생을 통해 우리를 구속해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값을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한 남자가 위험한 파도 속을 헤엄쳐 가서 바다에 빠진 한 소년을 구조했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은 소년이 자기를 구해 준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제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는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습니다.
"괜찮다, 꼬마야. 다만 너의 생명이 구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앞으로 너의 인생에서 증명해 보이거라."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것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14)입니다.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 그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 대목을 '선한 일을 갈망하는'(eager to do what is good, NIV) 사람, '선한 것 외에는 아무런 열망도 없는'(no ambition except to do good, JB)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선한 일을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구속해주셨습니다. 다른 이를 복되게 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을 돕고, 어려운 이들의 힘이 되어 주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은 성도들은 마땅한 의무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반드시 선에 대한 열정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

이제 욕망 충족을 위해 숨차게 달려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내가 어디 쯤에 와 있는지, 나와 더불어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이며, 주님이 내게 시키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생명을 살려주었지만, 그의 가슴속에 선의 씨앗도 심었습니다. 한 영혼의 가슴에 심긴 선의 씨앗은 동시에 분열된 세상을 일치시키는 평화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어둡고 칙칙한 세상을 보며 투덜거리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 한 줄기 빛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오늘은 남북의 정상들이 6.15공동선언을 한지 3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때 우리는 한반도에 드리운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먹구름을 보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문제로 한반도에는 냉기류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의미 있는 일도 있습니다. 어제 남북이 함께 거행한 경의선·동해선 연결식 행사가 그것입니다. 나뉘었던 민족의 혈맥이 다시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렸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에스겔 선지자의 상징행동을 떠올렸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쓰고, 또 다른 막대기에다가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쓴 후에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결하여 하나가 되게 했습니다(겔37:16-19). 예언자는 반목하고 불신하던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새로운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열릴 것을 예고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화와 통일의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면 하나님은 그 나무를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향한 발걸음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존재로서는 샬롬의 세상을 열기 위해 꾸준히 걸어가시기를 빕니다. 부디 우리가 달려가는 길의 끝에서 주님의 인자하신 미소를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