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6. 눈빛 맑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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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6:22-23
설교일시 200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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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 맑은 사람
마6:22-23
(2003/6/29)


눈은 영혼의 창

축구선수인 이영표 씨의 별명이 뭔지 아세요? '초롱이'라지요? 화면에 비친 모습만 봐도 눈이 초롱초롱해 보여 흐뭇합니다. 게다가 그가 믿음 좋은 젊은이라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눈빛이 흐리멍덩하거나 거슴츠레한 사람을 보면 왠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게다가 탐색하는 눈빛으로 아래위를 훑어보기라도 하면 영 그 자리에 있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눈빛 맑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들은 세속에 떠밀리며 사느라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를 일깨웁니다. 그 눈은 강박적으로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거울'이 되어 우리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저는 예수님의 눈이 참 맑고 깊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눈빛이 흐리멍덩한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가능성들을 일깨우는 눈빛이 흐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눈은 '영혼의 창'(오르테가)이라지요? 눈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감정을 저절로 흘러 내비칩니다(流露). 감정을 잘 조정하면 낯빛까지는 숨길 수 있겠는데, 눈빛을 숨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맹자는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데 있어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눈동자는 능히 자기의 잘못을 감추지 못한다.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가슴속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어두운 것이다(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 焉/離婁章句上 十五章). 말은 거짓을 할 수 있지만 눈동자는 거짓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봐!" 하면 무서워요. 흉중부정이 드러날까 해서 말입니다.

저는 종종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서있는 모세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고, 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을 굽어봅니다. 120세 노인이 바람 찬 산 위에 홀로 서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 생의 경주를 막 끝내려는 참입니다. 인생무상을 느꼈을까요?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심회가 남달랐을 겁니다. 그가 늙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고 전합니다. 젊었을 때의 형형한 눈빛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걸어온 세월에 의해 깊어진 그 눈빛이 흐리지 않았다는 말이 사무치게 좋습니다. 성도의 눈빛은 맑고 깊어야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약이라도 있다면 먹어볼 텐데, 아쉽게도 그런 약은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젊은이들은 '콘택트 렌즈'를 끼면 된다고 그럴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건 가짜지요. 맑고 깊은 눈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욕심을 자꾸 비워내야 합니다. 가슴속에 있는 바르지 못함을 자꾸 덜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속 빈 항아리가 맑은 소리를 품듯이, 내면에 여백이 있어야 우리는 맑은 소리를 내는 사람, 눈빛 맑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죄는 '바라봄'에서 비롯됩니다. 사단의 꼬임에 빠진 하와가 눈을 들어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 문제는 이미 생긴 겁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눈앞의 이익을 챙기는 데 발밭은 사람의 눈은 먼 별빛을 향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앞의 것만 바라보는 눈빛은 점점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밖에서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보는 데는 그런 대로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눈을 통해 들어온 시각 정보를 가지고 뇌는 판단을 합니다. 좋다/싫다, 예쁘다/밉다……그런데 이런 판단은 참 피상적인 것입니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은 객관적으로 보면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눈이 제대로 박힌 자식이라면, 그 주름의 갈피마다 담겨 있는 신산스런 삶의 이야기를 아는 자식이라면, 어머니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랑과 희생을 볼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사내의 비참한 최후를 보았지만, 백부장은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눈은 우리를 속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외부를 살피는 육신의 두 눈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살피는 제3의 눈을 얻어야 합니다. 그 눈은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동양사람들은 '본다'는 말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見'입니다. 이 글자는 일부러 보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觀'인데, 이 글자는 일부러 보려고 생각하고 보는 것입니다. '꿰뚫어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직관'(insight)에 해당하는 말일 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하셨을 때 주님은 꽃의 빛깔이나 형태를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현상적인 세계 이면에 있는 생명의 실상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 앉은앉은뱅이 거지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행3:4). 이전까지는 그저 풍경으로만 보았던 사람을 이제 내밀한 소망과 아픔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누더기 속에 감춰진 '존귀한 인간'을 본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보느냐, 또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 생의 내용과 질을 결정합니다. 욕망을 따라 눈앞의 것들만 보면 우리 인생은 비루해질 것입니다. 음란한 세상입니다. 벌거벗은 욕망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성적 탐닉과 과도한 소비를 부추깁니다. 사람이 그의 존재와 품성으로 평가되기보다는 그가 내보이는 '기호'(code, sign)로 평가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점점 자기다움을 잃고, 세상이 유인하는 대로 이끌려가기에 분주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사람 구실하기 어렵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눈에는 이웃의 고통도, 하나님의 마음도 보이지 않습니다. 타락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 하십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지만,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워집니다. 삶이 오리무중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꾸짖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 세우시고는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지체없이 대답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간절한 소망과 그의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막10:46-52).

바디매오처럼 우리도 절박한 마음으로 주님께 '보기를 원한다'고 아뢰어야 합니다. 간절함이 없이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순간 우리의 눈빛을 주님의 눈빛에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십시오. '久則通'이라 했습니다.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어느 순간 열린다는 말일 겁니다. 누구를 바라보든 그 사람의 '허물' 보다는 '아름다움'을 보려고 애쓰십시오. 어떤 사태를 만나든 그 속에 있는 '불편함'이나 '괴로움'만 보지 말고 그 일 속에 담긴 '의미'를 보려고 애쓰십시오. 물론 이 말은 불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눈이 열리면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처럼(왕하6:17) 우리도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총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이웃들의 고통을 아픔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 삶은 기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눈뜨고,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려고 마음쓰는 일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웃을 그리고 피조 세계를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눈빛이 맑은 사람, 예수님을 닮은 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팔순이 지난 老詩人 구상 선생님의 <마음의 눈을 뜨니>라는 시를 읽어드림으로써 오늘의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
마음의 눈을 뜬다.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
그 실용적 이름에서 벗어나
저마다 총총한 별처럼 빛나서
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그지없다.

무심히 보아 오던 마당의 나무,
넘보듯 스치던 잔디의 풀,
아니 발길에 차이는 조약돌 하나까지
한량없는 감동과 감격을 자아낸다.

저들은 저마다 나를 마주 반기며
티없는 미소를 보내기도 하고
신령한 밀어를 속삭이기도 하고
손을 흔들어 함성을 지르기도 한다.

한편, 한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새삼 소중하고 더없이 미쁜 것은
그 은혜로움을 일일이 쳐들 바 없지만
저들의 일손과 땀과 그 정성으로
나의 목숨부터가 부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너무나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의 그 始原1)의 빛에 눈을 뜬 나,
이제 세상 모든 것이 기적이요,
신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으며
더구나 저 영원 속에서 나와 저들의
그 완성될 모습을 떠올리면 황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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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에는 '始源'으로 표기되어 있음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