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7. 천지현황(天地玄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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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욥38:1-7
설교일시 200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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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현황(天地玄黃)
욥38:1-7
(2003/7/6)


나로 알게 하옵소서

욥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이웃들에게 선을 베풀며 살던 사람이지요. 하지만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복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창졸간에 가장 비극적인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참 느닷없는, 그리고 영문모를 전락이었습니다. 욥기의 저자는 그것을 사단과 하나님의 내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욥의 불행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도, 그에게 기쁨을 주던 자식도 다 잃었어요. 웬만한 사람이라면 살맛을 잃고 하나님을 원망할 법도 하지요. 그런데도 그는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1:21)


하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空手來空手去의 천리를 터득한 도인인 것 같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온 몸에 독한 피부병이 생겨서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하지요. 하지만 욥은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


하고 아내를 달랩니다. 마치 번뇌의 불꽃이 다 꺼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욥의 아내를 미욱한 여자라고 욕할 수 없습니다. 그 여인의 반응이 어쩌면 더 인간적인지도 모르겠어요. 그에 비해 욥의 흔들림 없는 믿음은 오히려 우리를 주눅들게 합니다. 그는 우리 마음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사람 같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렇게도 믿음이 좋던 욥도 영문모를 괴로움이 지속되자 견딜 수 없었나봅니다. 더욱이 자기 불행 앞에서 우두망찰하여 어쩔 줄 모르는 세 친구를 보면서, 자기의 고통스런 처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그는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지요.

욥의 말이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처럼 들렸던지, 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친구들이 마침내 자기들 속에 있는 의구심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네가 겪는 불행이 너의 숨겨진 죄의 증거'가 아니냐고 으르댑니다. 그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욥을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욥은 자기의 원통함과 억울함을 밝혀줄 이는 하나님밖에 없기에 하나님을 향해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밝혀달라고 하소연합니다.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10:2)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기라도 한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고통은 이미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무의미함입니다. 고통을 통해 아무 것도 낳을 수 없고,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불모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욥의 마음이 제풀에 잦아들 무렵, 마침내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을 건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38:2-3)


네가 어디 있었느냐?

하나님은 당신의 정의가 어디 있느냐는 욥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욥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정말 뜻밖의 질문입니다. 욥은 자기가 겪는 고통의 원인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은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욥은 아무 한 일도 없습니다. 욥은 입을 다물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온 우주의 창조와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피조물들의 창조와 질서있는 운행에 네가 어떤 기여를 했느냐는 것입니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인가요? 하나님은 내가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항변하는 욥에게 눈을 들어 이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 앞에서 그는 자기의 작음을 절감하지 않았을까요? 파스칼은 "이 광대한 우주의 무한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서 우리가 아는 것이라야 기껏 바다의 모래알 하나에도 못 미치는 것 아니겠어요?

'네가 어디 있었느냐?' 이 질문은 무한한 신비의 심연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미시의 세계와 거시의 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조차 우주에 신비에 접근할 때마다 외경심에 사로잡힌다고 합니다. 우주는 깊이 들여다볼수록 오묘하고, 그 세계 앞에서 인간은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마땅히 이러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을 때는 실망하거나,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욥은 넋이 빠진 듯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5)


가뭇한 하늘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들의 우주론을 담고 있는 <천자문>의 첫 네 글자는 '천지현황'입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말인데, 얼핏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땅이 누렇다는 말은 알겠는데 하늘이 검다는 말은 좀 난해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검을 '玄'은 하늘의 물리적인 빛깔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늘에 대한 고대인들의 경외감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답니다. '玄'이 '黑'과 다른 것은 그 속에 모든 색깔을 다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색을 합치면 검은색이 된다지요? 달리 말하면 검은색 속에는 모든 색이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게 '玄'입니다. 그러니까 '玄'으로서의 하늘은 '그윽하고 멀어서 인간의 지각이 미칠 수 없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기도할 때의 하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머무신다는 그 하늘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그 안에 품고 계신 하나님의 품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품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크기 때문에 초월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조정자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 눈에 느려 보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세상일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개입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느림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계획에 동참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게 보살피심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소명은 바로 생명을 지키고 북돋는 일입니다.


생명의 감수성 회복

저는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인류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패권주의 때문에 전 세계가 다시금 군비경쟁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이고 반역이 아닌가싶어요. 하나님은 온 우주를 사랑으로 감싸안고 계신 분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동료 인간과 자연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짓이에요. 이런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줄 아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일 겁니다.

욥은 시련을 통해서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을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 안 됐지요. 하지만 그의 눈은 이제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깊은 신비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너'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 '너'는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고, 우리가 함부로 대하는 피조물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우리 각자가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조금만 깊이 보면 우리가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동료 인간들과 피조물의 아픔,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에 민감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다소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모두가 함께 생명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세상을 이루기를 소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를 삶의 모토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청계천 복원을 위한 소중한 발걸음이 시작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라는 다소 염려스러운 목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새만금을 되살려 생명과 자연이 살아 숨쉬게 하자는 이들의 행렬이 있고, 그 반대편에서는 새만금 간척사업을 속히 완성하라는 또 다른 이들의 행렬이 있습니다. 어느 행렬에 가담할 것입니까? 선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은 생명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중대한 시기에 생명의 감수성에 먼저 눈을 뜬 우리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물질적인 풍요보다 더 멋진 삶이 가능함을 온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십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생명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