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8. 찬물에 얼굴 씻듯이
설교자
본문 사40:27-31
설교일시 2003/7/13
오디오파일
목록

찬물에 얼굴 씻듯이
사40:27-31
(2003/7/13)


장밋빛 쇠사슬

날이 더워서는 아닌데, 언제부터인지 저는 손을 자주 씻는 버릇이 생겼어요. 몸과 마음에 피로가 쌓일 때마다 마치 그것을 씻어내듯이 찬물로 손을 닦거나 세수를 하는 거지요. 그러면 심기일전할 수 있습니다. 이슬을 머금은 풀꽃들이 우리 마음에 청신함을 주듯이, 찬물에 세수를 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집니다. 현대인들은 다 피곤합니다. 지친 얼굴을 대할 때면 세숫대야 가득 물을 떠다 주고 싶어요. 피로는 만병의 근원이라지요? 피곤할 '疲'자는 '병질 엄'과 '가죽 피'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피곤한 사람의 얼굴빛은 먼저 색깔로 드러납니다. 누렇게 뜨는 거지요. '勞'의 자형을 보더라도 힘을 많이 써서 열이 위로 올라간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게 다 병적인 상태입니다.

아기들 얼굴 빼놓고 피곤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화장발로 커버를 해보아도 안에서 나오는 광채가 없는 한 그 얼굴을 청신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지요? 우선 과다한 일과 그에 따른 잠 부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전에는 잠꾸러기들이 참 시시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그런 이들을 존경합니다. 그들은 일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우리가 일찌감치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끄고 밤의 고요 속에 머물 줄만 알아도, 우리 삶은 한결 가뿐해질 거예요. 우리가 고요히 쉬지 못하는 까닭은 쉬는 순간 누군가가 우리를 앞질러나가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거지요. 6세기의 로마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욕망을 '장밋빛 쇠사슬'이라고 표현했어요. 절묘한 말입니다. 욕망은 장미꽃처럼 휘황하지만, 사실은 쇠사슬처럼 우리를 얽어매는 속박이라는 말이겠지요. 전도서 기자는 채울 길 없는 욕망의 질곡 속에서 허덕이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1:8)


전도자의 혀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 않습니까? '왜들 그리 바빠?'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그래?'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지 않던가? 채움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한 만족은 없다네. 비우고 또 비워 가벼워지면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거늘.'


피로, 원천으로부터의 분리

만성적인 피로에 빠질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경직과 둔감함 그리고 위축이 아닐까요? 몸과 마음이 뭔가에 시달려 피로해지면 우리는 화를 잘 냅니다. 외부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세상을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외부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증상이라면 자기와의 관계에서 피로는 둔감함으로 나타납니다. 몸과 마음이 고단해서 나른해지면 우리의 반사신경은 확연히 둔감해집니다. 졸음 운전을 하다보면 의식으로는 핸들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면서요? 피곤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응답하지 못하고, 이웃들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못합니다. 응답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이건 굉장히 가슴 아픈 일입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한 사람들의 또 다른 증상은 자기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도할 엄두도 못 내고, 변화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허둥댑니다.

몸과 마음이 피로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유죄 판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기분 좋은 피로도 있지요. 운동을 한 후에 느끼는 피로, 봉사활동을 한 후에 느끼는 피로, 자기 일을 끝내고 난 후에 느끼는 나른한 피로…. 하지만 기분 나쁜 피로, 뭔가 창조적인 것을 해낼 수 없는 무기력으로 나타나는 피로는 우리 삶이 잘못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몸이 지나칠 정도로 피곤하다는 것은 몸의 한계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고, 마음이 피곤하다는 것은 지나치게 마음을 썼다는 말입니다. 지나침, 이게 바로 우리 삶에 대한 유죄선고가 아닐까요?

또한 몸과 마음의 피로는 우리 삶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입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자기 기만 속에 살고 있음을 아주 예리하게 보여줍니다.


"신들을 찾아 나선 여행길이 고되어서 지쳤으면서도, 너는 '헛수고'라고 말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너는 우상들이 너에게 새 힘을 주어서 지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구나."(사57:10)


우리는 장밋빛 쇠사슬인 욕망에 따라 살면서 지쳤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뭔가 삶이 변화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힘들다고 하면서도 옛 삶의 방식을 고수합니다. 돈만 있으면 피곤한 삶이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힘든 것은 뭔가가 한 2%쯤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2%는 어쩌면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삶

우리 삶이 건강해지려면 새로운 곳에서 활력과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남들과의 경쟁 논리에 매여있는 한 우리는 행복해질 수도 건강해질 수도 없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저는 우리가 이 말씀을 꼭 붙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는 '사막은 아름다워…'하고 말합니다. 사막이 아름답다니요? 어떤 생명도 살아갈 수 없는 그 황량한 곳이 아름답다니요? 어린 왕자는 말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수가성에 살던 한 고독한 여인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절대로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과 만나 새로운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우물'이십니다. 멋진 생의 비결은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여호와를 앙망하라"고 권합니다. '仰望'이란 '우러러 바라'는 것입니다. 그냥 넋을 빼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말일까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에는 삼중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하려면 먼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던 것에서 눈을 들어야 합니다. '돈'과 '성공'에 붙들려있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분주함 속에서도 예배를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 기도할 시간을 마련한다는 것, 이게 이미 생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고향과 부모 곁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떠나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새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둘째,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놓여납니다. 자기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결과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있지요? 믿음은 '맡김'입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족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평안합니다. 웃을 수 있습니다.

셋째,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에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아멘'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실 때 그것을 이루어낼 수단과 시간을 함께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과 압박감도 몰아내십니다. 물론 인생이라는 게 날마다 호시절일 수는 없어서 어려운 일도 겪게 마련이지만, 그 어려움을 겪어내는 방식은 저마다 다릅니다. 성도들은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시는'(호2:15)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회피하고 싶고, 도망하고 싶은 저주의 장소를 오히려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신다는데 겁낼 게 뭐 있겠습니까?


하늘을 비껴 나는 독수리처럼

이사야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 합니다. 하늘을 비껴 나는 독수리의 날갯짓은 얼마나 멋집니까?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몸이 무거우면 사소한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지지만, 힘이 넘칠 때는 웬만한 장애물을 만나도 쉽게 넘어갑니다. 성도들은 작은 일 앞에서 앙앙불락(怏怏不樂)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우리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예수를 믿는데도 맥이 없다면, 삶에 기쁨이 없다면, 웃음을 잃었다면 문제입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살다보면 지치고 낙심될 때도 있지만, 성도는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입니다. '주님, 이게 제 모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 이놈 정말 못됐구나. 혼을 좀 내줘야지!' 그러실까요? 아니지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다소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해도 그냥 덥석 받아주시는 분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찾아내시려고 돋보기를 들고 계시는 노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두손들고 나가면 주님은 우리의 실패와 고통과 좌절조차도 아름다운 생의 계기로 바꿔주십니다.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시는 주님, 그 주님을 의지하기에 우리는 늘 행복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 앞에 설 때만 우리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눅진눅진한 피로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른할 때 찬물로 얼굴을 씻듯이 우리 마음을 주님께 들어올리면 우리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여름이 살맛나는 순간들로 채워지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