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9. 나는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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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13:44-46
설교일시 2003/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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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적이다
마태13:44-46
(2003/7/20)


원초적 욕망을 넘어서

어릴 적부터 우리는 땅속에 묻힌 보물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김장독을 묻기 위해 땅을 파거나, 야영지에서 화장실용으로 땅을 파다가도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리면 '혹시나' 하다가 혼자서 멋쩍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든, 모험을 통해서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만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런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 스티븐슨의 모험소설 <보물섬>입니다. 이건 그래도 낭만적인 데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낭만적인 꿈을 제도의 틀 속에 가두어서 사람들을 퇴영적으로 만드는 시대입니다. 로또니, 토토니 하는 복권이 그것입니다. 또 경륜, 경마, 경정, 카지노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물섬이나 보물지도에 대한 꿈은 사람들을 모험적인 삶으로 인도해 일상적인 삶의 지평을 넓혔지만, 제도화된 꿈은 사람들을 절망 속에 가두어 둡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보물 이야기를 하면 눈이 번쩍 뜨인다는 것을 아셨나봐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밭에 묻힌 보화 이야기와 진주 이야기를 하셨겠지요? 물론 여기서 보화와 진주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상징어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비윤리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비유의 강조점은 '모든 것을 다 팔아'라는 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지금까지 자기가 집착하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더라도 전혀 아까운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옹골진 삶을 정말로 원한다면 우리는 삶을 자꾸 단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절하게 많은 것에 매여 살기보다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잡기 위해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를 꼭 붙잡는 것, 그게 멋진 삶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를 붙잡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해도 좋고 '하나님'이라도 해도 좋습니다. 예수님을 그 하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다 내놓으셨습니다. 그 하나를 붙잡으면 갈짓자 걸음을 멈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그 '하나'를 붙잡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보화 아닌 것을 보화로 알고 사는 것 아닐까요? '돈', '명예', '권세'…이걸 잡으려고 사람들은 혈안입니다. 모델 하우스마다 쫓아가야 하고, 주식 시세 변동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자기를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 치장하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그러니 늘 피곤하지요? 노자는 '사냥질에 뛰어 다니는 것이 사람 마음을 미치게 한다. 얻기 힘든 보화가 사람으로 하여금 덕행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馳騁田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妨'(道德經, 12章) 했습니다. 꼭 맞는 말입니다. 새로운 것, 희귀한 것, 이익이 될만한 것에 마음이 매여있으니 그 속에 하늘의 평화가 깃들 틈조차 없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가 말뚝에 매인 염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뚝 주위만 맴돌면서 풀을 다 뜯어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나무껍질까지 벗겨먹는 거지요. 결국 염소는 주위를 황폐하게 만듭니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도 '염소과'가 된 건 아닌가요?


보물은 밖에 있지 않다

밖에서 보물을 구하는 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진정한 보화와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소풍 가면 꼭 하는 보물찾기 놀이에서 뭘 찾아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보화를 안에서 찾는 일에 비교적 익숙합니다. 성도들은 먼저 자기 속에서 보화를 찾아야 해요. 그 후에 바깥에서 찾아야지요. 그럼 그 보화란 뭡니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4:6)을 우리 속에 깃든 보배라고 했어요. 어렸을 때 개똥벌레를 잡아서 호박꽃에 넣고 꽃을 오무린 채 빙빙 돌렸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면 호박꽃이 훤해지지요. 물론 그것은 꽃 속에 있는 개똥벌레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빛, 그 빛은 그의 내면에 누가 계신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 속에 보화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바깥을 꾸미는 데 그렇게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만나도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지도 않고요. 내면이 뭔가로 그득하면, 우리는 너그럽게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보화를 찾아 멀리 갈 것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들 속에 진기한 보화를 넉넉히 숨겨두셨어요. 그걸 찾아야해요. 문제는 그 보화가 깊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데,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그 보화 위에 먼지가 앉기 시작한 겁니다. 아기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天眞無垢'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연 그대로의 참됨과 흠없음', 이게 아이들의 세계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세월의 더께만큼 그 보화 위에 욕망과 자만심과 낙담의 먼지가 쌓이면서, 우리가 본래 누구인지를 잊고 삽니다. 지금 문화관광부 장관인 이창동 님이 만든 영화 중에『박하사탕』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영화의 첫 대목은 한 사나이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선 채, "나 돌아갈래"라고 외칩니다. 잃어버린 순수를 되찾고 싶다는 말일 겁니다. 우리도 돌아가야 해요. 그런데 돌아간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물론 살다보면 돌아감의 계기가 되는 일도 더러 있어요. 그건 대개 인생이 자기 뜻대로 안 될 때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때로는 사람들을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욕망과 자만심의 더께를 깨는 망치가 되기도 합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찬330장 2절)


고통과 시련을 통해 자기 본연의 모습을 기억해 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설 때 우리는 인생의 봄을 맞이하게 되고, 이전에는 없었던 꽃을 활짝 피워내게 됩니다.


벚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그 속엔 벚꽃이 없다.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얼마나 많은
벚꽃이 피는가.
―15세기 일본 선승 이뀨


우리 속에는 없는 줄로 여겼던 무궁무진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들은 더 이상 울적함 속에서 세월을 보내지 않아요. 이전에 알지 못했던 평안, 자유, 기쁨, 감사, 든든함을 날마다 맛보는 사람이 어찌 한숨만 내쉴 수 있겠어요? 우리 속에는 이런 보물들이 이미 숨겨져 있습니다. 물론 슬픔과 고통의 계곡 깊은 곳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고통과 슬픔이 만든 틈으로 하늘의 빛이 우리 속에 비쳐들면 그 보화가 드러납니다.


나는 기적이다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삶이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기적이다." 한 주간 동안 저는 이 말씀과 만나 참 행복했어요.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이름을 대거나, 직업, 혹은 직함을 댑니다. '나는 ∼입니다'. 물론 이름도 중요하지요. 또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역할도 중요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단적으로 대답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나는 ∼입니다'라는 식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술어'(述語, 주어에 붙어 그 동작, 상태, 성질 등을 풀이하는 말)로써 자기를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술어로 자신을 표현하시겠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신 술어를 보면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길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진리다.'
'나는 빛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수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생이 왜 그리도 당당하고 멋진지 알 만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자기 규정은 일상의 현실 속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일상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있습니다. 아르키메데스는 "나에게 지렛대와 설자리를 마련해달라. 그러면 지구라도 움직여보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가 지렛대와 설자리가 되셔서 이 세상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우리가 하도 작은 일에 매여 전전긍긍하며 사니까, 아예 우리 삶을 이렇게 규정해주셨어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런 정의를 나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살 때 우리는 참 멋진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 이보다 더 큰 기적이 또 있겠어요? 성도는 어느 곳에 처하여 있든, 누구를 만나든 기쁨의 분위기를 만들고,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려고 마음 쓰는 사람입니다. 한번 그렇게 애써보세요. 우리 생의 무게가 굉장히 가벼워질 겁니다. 물은 이르는 곳마다 자기를 내주어 뭇 생명들을 살게 합니다. 우리가 이르는 곳마다 쭈뼛거리지만 말고, 스스로 주인처럼 봉사하려고 마음먹고 살면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이든 그곳이 곧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성지가 됩니다.

며칠 전 인천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30대 여인이 세 아이와 동반 자살을 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죽기 전날인가요, 그 여인은 교회에 다니는 동네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면 마음이 어떠냐"고 물었답니다. 누군가 그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더라면 어쩌면 그런 참혹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인간성의 불모지인 현실을 '거룩한 땅'으로 바꾸라고, 절망의 우물에서 소망의 샘물을 길어 올리라고, 미움의 땅에 사랑을 심으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그 부름에 응답하여 우리가 여기저기서 생명의 기적, 사랑의 기적을 일으킬 때 우리는 가장 진기한 보화를 얻은 것처럼 행복할 것입니다. '나는 기적이다.' 이것은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난 이의 감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이런저런 기적으로 충만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