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0. 돼지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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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레11:1-8
설교일시 200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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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위한 변명
레11:1-8
(2003/7/27)


음식과 정체성

나라마다 독특한 음식문화가 있습니다. 우동·스시 하면 일본이 떠오르고, 스파게티·피자 하면 이탈리아가 떠오릅니다. 김치나 불고기 하면 우리 나라가 떠오르겠지요. 먹는 것이 한 사람의 생을 어느 정도 결정한다고 보면, 한 민족이 유지해온 고유의 음식문화는 그 민족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입맛조차 조종당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통합되어 가는 제3세계 나라들은 먼저 입맛부터 植民化되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맥도널드'와 '코카콜라', 그리고 '스타벅스'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세계의 젊은이들은 할리우드 영화에 중독이 되다시피 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식 삶의 방식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건 참 위험한 상황입니다. 생명의 특성은 다양성에 있는 것인데, 모두가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통일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화 전반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오늘은 주로 음식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저마다의 풍토와 기후 조건, 또 생활 환경에 따라 독특하게 형성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굼벵이를 주된 단백질 공급원으로 삼는 부족은 미개하고, 푸아그라를 먹는 사람들은 문명인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돼지를 신성한 동물로 여기지만, 어느 지역에서는 부정한 동물로 취급하고, 많은 민족들이 소를 즐겨먹지만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성시하여 먹지 않는 것도 다 까닭이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규정이 까다롭기는 아마 유대인들이 으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은 아주 복잡한 정결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켰습니다. 레위기에 등장하는 음식 규정은 매우 복잡합니다.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의 구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조리법도 너무나 복잡해서 우리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레위기의 음식 규정대로 살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복잡한 음식 규정은 어디에서 왜 생긴 것일까요? 학자들은 대개 그것이 주전 6세기 경, 바벨론에 잡혀가 포로살이를 하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비롯된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이 성가신 정결법에 집착한 데는 매우 진지한 사회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방지역에 살면서 행여 자기 민족의 동질성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동질성을 매개해주는 것 가운데 음식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입맛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는 것 아시지요? 오늘 우리 시대의 세대적 단절의 주된 원인을 식습관의 변화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된장·고추장·김치, 그리고 숭늉에 익숙한 어른들과, 햄버거·피자·스파게티·콜라에 익숙한 젊은 세대간에 문화적 동질성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음식 규정을 만들고 또 그것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특별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동질성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돼지는 억울하다

유대인들이 가장 금기시한 짐승이 돼지입니다. 돼지는 여러 모로 좀 억울한 동물입니다. 돼지는 좀 억울하겠어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본성대로 살뿐인데 부정한 짐승 취급을 당하니 말입니다. 저는 오늘 돼지에 대한 변명을 좀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말에서도 '돼지' 자가 들어가는 말에 좋은 뜻으로 쓰이는 말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있다면 '돼지 꿈' 정도일까요? 우리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을 보면 '돼지처럼 먹는다'고 하지요? 몸이 다소 뚱뚱한 사람을 보면 '돼지'라고 놀려댑니다. 좀 깨끗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돼지 같은 놈'이라고 하고, 머리카락이 좀 뻣뻣한 사람을 보면 '돼지털'이라고 놀려댑니다. 돼지가 이런 취급을 받는 까닭은 뭘까요? 돼지가 사는 모습을 보면 사실 깔끔한 거 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진흙탕에 뒹굴기를 좋아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배설물 위에 뒹굴기도 일쑤입니다. 그것은 돼지가 유난히 더러운 동물이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래요. 땀샘이 없는 돼지는 신체의 열을 조절하는 체계가 발달하지 않아서 몸을 물이나 진흙에 적셔야 한답니다. 이것이 돼지가 모욕을 받는 생리적 이유입니다.

그런데 돼지는 다른 이유 때문에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동물을 평가할 때 어떤 표본이 되는 동물에 견줘보면서 그것과 비슷하며 정상, 많이 다르면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물의 표본은 소입니다. 그로부터 동물은 소와 같이 되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져야 정상이라는 견해가 나왔습니다. 돼지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니까 부정하겠지요? 물고기는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어야 정상이고 없으면 부정합니다. 장어는 부정하겠지요? 날개를 가진 곤충은 날아다녀야 정상이지 뛰어다니면 부정합니다. 메뚜기는 뛰어다니는 것으로 보이니까 부정한 것이지요.

다른 것은 그만 두고 짐승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왜 하필이면 유대인들이 정상적인 짐승의 조건으로 되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진 것을 들었을까요? 그 속에는 매우 중요한 생태적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동물, 즉 소·양·염소 등은 섬유소가 많이 포함된 식물을 주로 먹고사는 채식동물입니다. 그 짐승들은 풀이나 짚과 같은 거친 섬유질의 먹이를 소화하기에 적합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동물들은 인간과 곡물을 두고 먹이 다툼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먹이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고기와 젖을 제공하고, 쟁기를 끌어 주고, 가죽은 옷감으로 제공하기까지 하는 거지요.

하지만 돼지는 잡식동물이기는 하지만 섬유소가 적은 나무 열매, 과일, 식물 뿌리, 곡물 등을 먹기 때문에 인간과 경쟁자가 됩니다. 돼지에게는 약점이 또 있습니다. 돼지에게는 사람이 먹을만한 젖이 없습니다. 쟁기를 끌지도 못하고, 털로 옷감을 만들기에도 적합치 않습니다. 그러니 돼지는 척박한 팔레스타인의 환경 속에서 금기 동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 가운데는 다른 민족과의 접촉 과정을 통해서 돼지고기를 먹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방 문화와의 同化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생태적 환경에서 볼 때 사육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또 그 때문에 값이 매우 비쌌던 돼지고기는 '타락한' 귀족들의 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공동체의 생존을 지켜내기 위해서 돼지고기를 부정한 음식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생활의 지혜가 종교적 금기로 바뀐 경우라 하겠습니다.


문화 제국주의를 경계하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기준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었습니다. 사실 비정상의 이름으로 멸시를 받거나, 박해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대인들조차 인종적 편견에 따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와 다르면 '비정상'으로 보는 버릇이 문제입니다. 어느 샌가 우리들도 우리만의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외국인들, 특히 백인들에 대해서는 친절하지만, 흑인이나 아시아권, 혹은 아프리카권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는 멸시의 시선을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 가운데 32.3%가 직장 내에서 인종차별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차별과 멸시에 주눅 들고 노동에 지친 그들의 퀭한 눈길을 대할 때마다, 우리 속에 있는 야만성을 아프게 자각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상황 속에서 돼지는 금기 동물일 수밖에 없음을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돼지 자체가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이들을 멸시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들도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개'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이방인들까지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때로는 그들에게서 유대인보다 더 큰 믿음을 보시고는 찬탄하시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늘에서 보자기에 쌓여 내려오는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을 때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내 기분에 따라 멸시할 수 없습니다. 또 힘이 있다고 제 멋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다른 문화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인류의 진보란 서로에 대한 존경의 진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는 지금 우리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의 미국의 행태를 보면 참 염려스럽습니다. 지구촌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고 난 후에 미국은 거의 힘에 의존해 세계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는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하더니, 최근에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물질을 규제하자는 <오존협약>도 마구 무시하고 있습니다. 오존층 파괴물질인 메틸브로마이드를 전 세계 사용량의 1/4을 사용하는 미국은, 골프장 잔디 관리와 목재가공에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PGA 골프나 LPGA 골프가 지구의 건강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구촌에 유일 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자기들과 다른 길을 가는 모든 문명을 '돼지'처럼 여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풍토에 맞는 문화를 향유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존중하고, 또 그들로부터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예배입니다. 성도들은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극한 정성으로 서로를 대하고, 나와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