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1. 하늘에 닿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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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36:5-9
설교일시 200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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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닿은 사랑
시36:5-9
(2003/8/3)


오늘은 바다로 가자

하늘을 가린 콘크리트 건물, 검은 아스팔트, 질주하는 차량의 물결, 희뿌연 하늘과 탁한 공기,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굳은 표정, 매스컴을 통해 듣는 우울한 세상일들, 변덕스러운 날씨보다 더 변덕스러운 인심…우울합니다. '굿 모닝'이라는 아침 인사말도 '씨티'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면서 악취가 배어들었습니다. 시편 36편의 시인도 악인이 활개를 치는 세상을 보면서 속상해 합니다. 그는 탄식하듯 말합니다. "악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역의 충동만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1) 게다가 그들의 눈빛은 또 어떤가요?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 양양하고, 제 잘못을 찾아내 버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2) 번들거리는 그의 눈은 항상 타인을 향할 뿐 자기를 돌아보지는 않습니다. 그의 말은 어떻습니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사기와 속임수뿐이니, 슬기를 짜내어서 좋은 일을 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3) 입에서 기름이라도 흐르듯이 매끄러운 말을 쏟아내지만 실은 그 속에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정말 우울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정진규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미 60이 넘으신 분이신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못 그윽합니다. 젊은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시는 데,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와 세상 참 더러워서 못 살겠다고 푸념을 했나봐요. 나이 드신 분으로서 한 두 마디 하셨겠지요. 아니 어쩌면 한 마디로 못했는지도 몰라요. 시인은 집에 돌아가서 곰곰히 생각해보았겠지요. 인생은 살 만한가? 그렇다면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하나? 그러다가 산문시 하나를 얻었어요. 문답식으로 되어 있는데, 읽어드릴 테니까 잘 가려서 들어보세요.


그러면 무엇해, 무엇해, 너는 말한다 나쁜 사람이 더 잘사는 세상이야 너는 말한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못해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끼니가 고작이야 지워지고 지워진 게 도대체 몇천 년이야 너는 말한다 지워지는 일은 아무나 못하는 일 그토록 어렵기에 하느님께서 네게만 맡기신 일 소용없어, 소용없어, 너는 말한다 모두 잊고 오늘은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면 된다 알 수가 있다 바다도 몇 천년을 그렇게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앞 물결을 뒷 물결이 싸악 지워내고 또다시 뒷 물결이 앞 물결을 싸악 지워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는 언제나 싱싱하게 싱싱하게 다시 채워지고 있을 것이다 지워지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다 분명하게 지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장 분명하게 다시 태어난다 사람아, 사람아, 더욱 온전히 사랑하거라 더욱 온전히 착해지거라 누리려 하지 말라 너는 분명히 어디에고 다시 태어나고 있다 사람아, 사람아, 누리려 하지 말라 몇천 년을 또다시 지워지는 사람되자, 지워지는 사람되자 싱싱한 바다를 만들자 세상의 밥이 되자(정진규, <밥詩·4>)


시인은 세상살이에 지친 영혼을 바다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출렁이는 바다로부터 한 말씀을 듣습니다. 바다가 언제 보아도 당당하고, 싱싱하게 유지되는 것은 앞 물결이 뒷 물결에게 자리를 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지울 줄 아는 사람이라야 바다를 만드는 사람이고, 세상을 먹여 살리는 밥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나의 '에고'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예수라는 큰 생명과 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36편 시인도 그 답답한 현실에 주눅들어 있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나 봅니다. 한없이 푸른 하늘 앞에 서면 우리는 말을 잊고 생각을 놓게 됩니다. 다만 가슴 한 켠이 시원해지고, 답답하게 막혔던 울혈같은 것이 스러지는 것을 느낍니다. 제 선배 목사님은 산을 오르다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느낌을 압니다. 허위허위 산을 오르다가 문득 눈을 들었을 때 산마루 저편에 아득히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보면 누구라도 '아' 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깊은 깨끗함을 보고 하나님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일에 지치고 낙심했던 시인이지만, 눈을 들어 하늘과 산과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 세상이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 안에 있는 것임을 깨달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다양한 얼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5-6a)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일에 대해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눈은 다른 이의 허물과 자기 이익을 찾기에 혈안입니다. 그래도 시인의 마음은 화창합니다.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하늘에 가득 차 있음을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부자와 빈자를 가르고,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를 가르지만, 하나님은 모든 차이를 사랑으로 감싸안고 계십니다. 시인은 우주의 뿌리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확연히 알았습니다. 투쟁이 아닙니다. 욕망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헨리 뉴엔 신부는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뿌리박을 때, 우리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가볍게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위해 사는 사람, 사랑의 기초 위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짐도 가볍게 질 수 있습니다.

시인은 주의 미쁘심이 궁창에 사무쳐 있다고 고백합니다. 세상 속속들이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간과하는 보잘 것 없는 것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한결같으십니다. 낳고 기르고 품어주십니다. 때때로 생의 어려움이 짙은 구름이 되어 하나님을 가리기도 하지만,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눈은 우리를 향하십니다.

시인은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잠시 동안 머물다 떠나지만 산들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세상에 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세상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의로 귀착되게 마련입니다. 세상이 암울해 보여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성공에 기뻐할 것도 없고, 작은 실패에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승리합니다. '事必歸正'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은 '바름'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 믿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합니다. 악인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반드시 값을 치뤄야 합니다. "악인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사악한 자들이 꽃처럼 피어나더라도, 그들은 영원히 망하고 말 것입니다."(시92:7)

시인은 주님의 공평하심이 깊고 깊은 바다와 같다고 말합니다. 바람에 따라 출렁임이 더 할 때도 있고 덜 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수평을 유지하는 바다처럼, 하나님은 높은 것은 낮추시고 낮은 것은 높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노래가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눅1:51-53)


인생은 축제

이런 확신이 있다면 인생은 축제가 됩니다. 도무지 두려울 게 없습니다. 시인은 이제 행복합니다. 그는 자기 삶을 주님의 집에 있는 것으로 배불리 먹고,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둡게만 보이던 세상도 돌연 주님의 빛으로 환해집니다. 너무 낙관적인 것처럼 보이나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사무치게 경험한 사람은 낙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힘겨운 일이 닥쳐온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안고 있고, 세상일은 결국 하나님의 의로 돌아가게 되어 있음을 안다면 낙심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작은 물결에도 이리저리 떠밀리며 요동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코메디 프로에 나오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한 사람이 고무줄에 매인 채 끌려갑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긴장합니다. 고무줄을 놓아버리면 끌려가던 사람 얼굴에 맞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끌려가던 사람이 가위를 꺼내서 그 줄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고무줄을 잡고 있던 사람은 갑자기 얼굴에 고무줄을 맞고는 머쓱한 표정이 됩니다. 우리 삶에도 이러한 반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시련이, 실패가, 고통이 '너 딱 걸렸어' 하면서 우리를 끌고 갈 때, 한 두 걸음쯤은 끌려갈 수도 있겠지만 다음 순간 그 줄을 딱 끊어버린다면 인생은 가벼워질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 상황에 시들시들 따라다니지 말아야 합니다(不隨萎萎地). 코브린의 랍비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대가 어떤 일로 해서 고통받을 때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이 인간에게 주는 것에 나쁜 것이란 없다. 그 대신 '이것은 약간 쓰군'이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약 중에는 쓴 약초로 만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이든 하나님의 사랑과 미쁘심, 의로우심과 공평함 밖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이 확신을 가슴에 새기고 산다면 우리는 세상에 활력을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휴가지를 찾습니다. 이 여름에 하늘과 바다와 산의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쿨'한 시간을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