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2. 영혼의 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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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눅7:44-50
설교일시 20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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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촉수
눅7:44-50


여인의 몸짓 언어

오늘 우리가 길거리에서 예수님을 마주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알아볼 수 있다면 그 인식 근거는 무엇입니까? 눈매가 부드럽고,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계실까요? 그런 이들은 많지는 않아도 더러 있습니다. 혹시 목뒤에 빛나는 후광을 생각하시나요? 만일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참 낭패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못 알아볼까 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몰라볼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낯선 남자에게서 그분의 향기를 맡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래도 왠지 예수님의 눈빛은 다정할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권위주의적인 표정으로 거리를 걷지는 않을 것입니다. 옷차림이 허름한 사람과도, 말투가 좀 거칠고 투박한 사람과도 격의없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탐색하는 눈초리로 사람들을 바라봄으로서 사람들을 긴장시키거나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지도 않으실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이지요.

게네사렛 호숫가 마을에는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여인은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시몬의 집을 찾았습니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집이었지만, 여인은 마치 무언가에 끌리기라도 한 듯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왔지만 여인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낯선 여인의 출현을 알아 차리셨지만 아무 말씀도 없이 여인이 하는 양을 지켜보셨습니다. 여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울음을 삼키느라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끊긴 자리에서 여인은 오직 몸짓 언어로 말했을 따름입니다. 성경은 그 광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7:38)


여인은 그 동안 사람들이 보내는 눈총에 상처 입고, 그들이 던지는 경멸의 돌팔매에 멍이 든 채 살아왔을 것입니다. 아무도 곁에 없습니다. 자신도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살았습니다. 세상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혐오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존재와 맞닥뜨렸을 때 여인은 자기 가슴의 빗장이 열림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숨죽인 울음은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자의 회한입니다. 여인은 예수의 발에 떨어지는 눈물을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그것은 참으로 순결하고 아름다운 몸짓이었습니다.


가슴의 사람과 머리의 사람

여인이 흘리는 눈물, 풀어헤친 머리카락, 그리고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는 그 일련의 행동은 이야기의 맥락을 떠나서 생각해보면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관능적인 행동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양 여인의 행동을 용납하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편치 않은 것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 입었던 한 영혼의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눈물로 자신의 발을 적시는 여인의 상처 많은 삶 전체를 사랑으로 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동일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인이 공적인 자리에서 우리 몸에 손을 댑니다. 사정이 어떻든 우리는 사람들의 야릇한 시선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행동은 어떤 관능적인 느낌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영혼이 열린 사람이라면 그 여인의 행동에 가식이나 억지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의 눈물은 자기 영혼의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 입니까? 여인은 예수에게서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정죄하지 않을뿐더러, 죄인들조차 친구로 삼으시는 주님의 가없는 사랑을 감지했기 때문일 겁니다.

정죄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과거의 한 모습으로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생명은 항상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성격이 전적으로 변화하기는 어렵지만 일부는 바뀔 수 있습니다. 생활 습관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을 과거의 인상에 따라 규정해버릴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정죄한다는 것은 그의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입니다. 그것은 그를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로 보려는 편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을 과거에 입각해서 보지 않고 미래의 모습으로 보십니다. 그리고 그가 그 미래의 모습을 성취해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았지만 그 여인이 편안하게 당신에게 다가오게 하심으로서 여인이 마음을 열도록 하셨다. 예수는 그 여인이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도록 허용하심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존중해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여인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순결함이 드러나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집주인인 바리새인 시몬은 어떠합니까? 평소라면 그런 행실 나쁜 여자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 집 문턱을 넘도록 허용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시몬은 여인의 행동을 만류하지 않습니다. 그녀를 존중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여인을 리트머스 시험지 삼아서 예수라는 사람을 달아보려는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만일 예수가 선지자라면 자기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여인의 행동을 용납하는 예수는 참 선지자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 여인의 아픔이나 사람다운 삶에 대한 갈망은 관심 밖의 문제입니다. 그는 가르고 나누고 판단하는 일에 익숙한 머리의 사람인 것입니다. 한 여인의 눈에서 쏟아져내리는 눈물도 숨죽인 흐느낌도 그의 가슴에 아무런 공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를 닮았습니까? 예수님입니까? 바리새인입니까?


손의 다양한 표정

나는 오늘 예수와 여인의 몸과 몸의 접촉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세상과 만납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행동이야말로 우리가 세상과 만나는 통로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촉감은 세상과 우리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매우 중요한 통로입니다. 손은 표정이 매우 다양합니다. 손은 우리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창문입니다. 사람들은 초조하면 손을 꼼지락거리거나 비빕니다. 기분 좋으면 박수를 칩니다. 화가 나면 주먹을 부르쥡니다. 안도감을 느낄 때는 가슴에 손을 얹습니다. 헤어질 때는 손을 흔듭니다. 화해를 청할 때에는 악수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루만집니다. 경외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린다. 손의 표정이 다양하다는 말은 이 때문입니다. 나는 눅4:40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


오늘의 병원 진료와는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처에 '일일이' 손을 얹어주셨습니다. 환부에 얹어진 예수님은 손은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애정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어린 시절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엄마 손을 약손' 하면서 배를 문질러주셨습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의 손길을 경험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곧 그의 사랑입니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우리 몸에 닿아야 우리는 온전해집니다. 예수님은 나의 발은 절대로 씻기실 수 없다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요13:8)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몸에 손을 얹어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가 손을 내밀어 주님을 만지는 능동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에 시달리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자기에게서 떠나는 것을 느꼈습니다.(눅8:44). 주님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을 때 많은 병자들이 주님께 나아와 그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눅14:36)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여인도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댐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

우리는 지금 누구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은 돈과 연줄을 향해 손을 내밉니다. 때로는 쾌락에 자기를 던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낡은 동아줄과 같아서 곧 끊어지게 마련입니다. 물 속에 빠져들던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곧 건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순결하신 예수님의 몸과 접촉함을 통해 자기를 괴롭히던 삶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기치 못한 사태 앞에서 몹시 당혹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은 바리새인 시몬의 삶에 대한 경고요, 심판입니다. 어쩌면 머리로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경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지금 보여주는 그 여인의 사랑과 신뢰의 몸짓이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의 의미를 바꿔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다른 영혼들과의 접촉점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행려병자들의 몸을 씻기고, 병든 이들에게 붕대를 감아주면서 주님의 몸과 접촉했습니다. 버림받았던 이들에게 그의 손길은 예수님의 손길이었고, 테레사 수녀에게 그들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닙니다. 접촉입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는 곳 어디에서나 생명의 기적이 나타났고, 예수의 몸과 접촉했던 이들은 누구나 구원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축제와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이 예수님과 몸으로 만나야 합니다. 인생의 짐을 더는 질 수 없어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위태롭기 이를 데 없는 한반도의 상황이 예수님과 접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만남의 매개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특히 우리들의 몸이 그러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사랑하고, 몸으로 섬길 때, 우리를 통해 주님은 세상을 어루만지십니다. 세상을 어루만져 새롭게 하시려는 주님을 위해 우리 몸을 드리는 것이야말로 몸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어머니의 손길이 우리 아픈 배를 어루만지시듯 주님의 손길이 이 상처 많은 세상을 어루만지셔야 합니다. 우리들이 몸으로 사랑하고, 몸으로 섬길 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주님께 산 제물로 바칠 때 주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역사에 몸바쳐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