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3. 이 사람을 보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23:39-43
설교일시 200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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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눅23:39-43
(2003/8/17)


성공의 우상화

자주 인용하는 말씀입니다만 쎙텍쥐베리의 어린왕자는 ‘사막이 아름다운 건 거기 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름 산을 오르는 맛 가운데 으뜸은 시원한 바람을 만나는 것과 옹달샘에서 맛보는 시원한 물입니다. 물 한 모금을 머금고, 바람을 쐬면서 딛고 올라온 길을 돌아보노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한 걸음도 거르지 않고 걸어서 올라왔다는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 어떤 때는 감격스럽기도 합니다. 하도 편법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막막해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어딘가에는 ‘옹달샘’처럼 샘물을 솟구쳐 목마른 이들을 위로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분들이 계신지요? 박목사님을 통해서 여러분께 익숙해진 시입니다만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는 사막과도 같은 세상의 우물이어야 합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에 살면서 분주함과 초조감, 내적 갈등에 시달리는 영혼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새로운 힘을 공급받는 희망의 샘터여야 합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고, 따뜻한 환대와 나눔의 정신이 피어나는 고요한 성소여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교회는 자본주의 정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목회의 성공을 교인수의 증가와 경상비 예산의 증가로 가늠하는 풍조가 생겨나면서 교회는 시장 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귐과 일치를 갈망하기보다는, 신앙을 한갖 입신양명과 천국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생겨났습니다. 일부의 교역자들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허무맹랑한 신화를 생산하고, 많은 이들이 그 신화를 소비하면서 교회는 점점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영광의 길이지만, 그 길은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지고 있습니다. 바벨탑의 욕망이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을 絶對善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성공의 우상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공의 우상화가 만들어낸 허상을 보고 있습니다. 이번 주중에 저는 참담한 자괴감을 맛보았습니다. 한국 최대의 감리교회라고 자랑하던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가 업무상 횡령 혐의와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습니다. 검찰은 구속영장에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해야 할 기독교계 대표지도자가 온갖 범죄를 저질러 종교계는 물론 사회전체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고 밝혔습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저는 이것이 비단 김홍도 목사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님을 잘 압니다. 우리는 이 말을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자정 능력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하나님은 앗수르나 바벨론을 당신의 칼로 삼아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십자가, 잔학성과 거룩함의 교차점
오늘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큰 교회를 짓고, 기도원을 짓고, 부동산을 사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정신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죄를 이야기하면 많은 이들이 고리타분한 교리쯤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뿌리깊은 죄성을 극복할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커지면 목에 힘이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을 낮추어 보기 시작합니다. 음성이 높아집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기준으로 삼아 잽니다. 그럴 때 ‘커진다’는 것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스스로를 크게 여김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웃들로부터 멀어지니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정신으로 끝없이 돌아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모습은 모든 것을 성공의 관점에서 판단하려는 사고방식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주님은 실패자의 전형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비쩍 마른 몸을 가릴 옷마저 빼앗긴 채 수치를 당하고 계십니다. 가해자의 편에 가담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잊은 채 예수를 조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정신의 크기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만 드러난다지요? 평안하고 행복할 때는 누구라도 친절하고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질 때,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스스로 한계상황에 직면했으면서도 낙심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마음을 내는 사람들은 정말 큰 정신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못박힌 손과 발의 극심한 고통, 탈수증세로 인한 정신의 혼미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 옆에 함께 못박힌 죄수의 말을 듣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 오신 당신의 일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당신을 버린 세상과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음을 압니다. ‘예수님이니까 그러신 거지’ 하면서 당연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은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요? 저는 불교도인 김달진 님의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의 사형!
이때처럼 인간의 잔학성을 보인 일은 아직 인류의 역사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때처럼 인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를 세상에 보인 일은 역사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으리라. (『山居日記』중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워 사람들 앞에 세우고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을 봅니다. 화해자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감싸안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잔학성과 거룩함이 만나는 교차점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예수적인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삶의 길은 우리 홀로 걸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길은 예수와 함께라야 걸을 수 있습니다.

망가진 시계를 통해서도 희망을
수십 년 전 영국 북부의 탄광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탄광은 안전시설이 매우 미비해서 사고가 자주 일어나곤 했습니다. 광부들이 믿을 것이라곤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강철같은 근육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느 날 갱도가 무너져서 12명의 광부들이 굴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일하고 있던 곳은 갱도 가운데서도 가장 깊고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석탄의 분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광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안부를 확인했습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조용히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소리가 미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던 것입니다. 일순 절망감이 몰려왔습니다. ‘구조자들이 때맞추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만 기다리는 일뿐이었습니다. 누군가가 통로를 개척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면 가뜩이나 부족한 산소를 급격히 소비하게 될 것이라며 그저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계시원”(time keeper)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광부들의 작업 시간과 산소량을 체크하는 임무를 띠고 있던 계시원이 대답했습니다. “사고 나기 직전이 10시 30분이었어. 우리는 모두 12명이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대략 2시간 분량의 산소가 남아 있어. 아마 별 일없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맑고 확고하고 강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갖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갱도의 저편에서 들려올 기계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따금 누군가가 “몇 시지?” 하고 물을 때마다 계시원은 성냥불을 켜서 시계를 확인하고는 “십 오분이 지났어”, “이제 겨우 10분 지났다구” 하며 대꾸했습니다. 묻고 대답하는 인터벌이 점점 길어졌고, 모두가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아무도 잠들지는 않았습니다. 산소가 거의 떨어져간다고 생각할 즈음 바위틈으로 달콤한 곡괭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시간을 묻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이 거의 지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신선한 공기가 갱도를 통해 밀려들어오고, 랜턴 불빛이 비쳐들면서 그들은 구조되었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일부러 명랑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그들의 음성은 목구멍을 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른 광부들과 아내, 친척들과 눈물범벅이 되어 뒤엉켰습니다. 12명 중 희생된 것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계시원이었습니다. 마을의 목사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을 때, 광부들의 안도의 눈물은 슬픔과 경악으로 이어습니다. 왜 계시원만 죽었단 말입니까? 목사가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당신들은 그곳에서 여섯 시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계시원의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을 때 그들은 계시원의 시계가 사고 당시인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계시원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면서도, 동료들을 비추어 줄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소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계시원을 통해 자비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얼굴과 그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막 같은 세상이지만 스스로 우물이 된 이런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지만 옹골진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늘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이게 우리 인생의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님과 같아질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중심과 우리의 중심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의 매개자가 되라고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있음이 곧 세상의 복이 되도록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