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4. 홀로, 그리고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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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빌1:27-30
설교일시 200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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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그리고 함께
빌1:27-30
(2003/8/24)


정신이 커지기 위해서는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볼 거울을 가져야 합니다. 거울은 유리의 뒷면에 절연물질을 입혀서 빛을 반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창문을 통해서는 밖을 내다보지만, 거울을 통해서는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거울이 되어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그렇고 스승이 그렇습니다. 친구들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들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임시방편의 자기, 참 자기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거울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삶의 척도로 삼아 우리 삶을 조율해가는 것을 가리켜 신앙생활이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예수적인 삶입니다. 예수적인 삶이란 '좋은 소식'이 되는 삶입니다. 우리는 '좋은 소식'입니까? 물론 누구에게 좋은 소식이냐는 문제는 남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소식'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도 '나'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이 '나'로부터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비결을 본문 말씀을 통해 배우고 싶습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에 매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구원받음의 증거라고도 말합니다. 두려움 없는 삶이라, 참 멋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슬픈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두려움의 뿌리를 더듬어보면 두려움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두려움의 뿌리가 '자기애'(self-love)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사랑한다는 그 '자기'라는 게 대체 무엇이냐 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지위, 재산, 명예, 인맥, 역할 따위를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지키려니 힘겹습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잠재적인 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주머니에 큰돈을 가지고 있으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 도둑 같아서 매우 불안해합니다. 누군가가 경쟁상대로 떠오르면 우리는 지위를 잃을까 전전긍긍합니다. 나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던 것을 잃으면 빈 껍질이 될 것만 같아 두려워합니다.

요즘 자살이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돈 때문에, 성적 때문에, 명예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자기 생명을 끊습니다. 그들은 잠시 동안 우리에게 와서 머물다 가버린 것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내 삶을 근사하게 장식해주는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남는 것, 그게 정말 '자기'가 아닐까요?

눈을 뜨고 나면 내가 누군가의 덕분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의 내 삶을 지탱해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고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잡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 곁에 머물다 속절없이 떠나가게 마련이지만, 하나님의 근원적인 사랑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잃게 되면 우리는 살아갈 용기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때로는 낙심할 수도 있고,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그는 넘어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한번 살아갈 희망을 갖습니다. 임시방편의 자기를 '참' 자기로 착각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누가 알아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고, 누가 외면한다고 해서 낙심하지도 않는 사람, 매 순간 하나님이 주신 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바로 섬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신앙적 주체는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두 가지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두 가지 특권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believing in Christ) 특권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suffering for him) 특권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제게 와서 자기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을 걱정합니다. 정말 걱정입니다. 생명의 특성은 자라는 것인데, 도무지 자라지 않는다면 병들었거나 노쇠했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믿음이 도무지 자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기도하지 않고, 성경 말씀을 읽지 않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지 않고, 몸으로 헌신하지 않고, 교우들과의 사귐에 소홀하면서 믿음이 자라기를 기대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혹시 여러분, '나는 믿음이 자라는 것 싫어' 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생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앉는 것입니다. 그건 늘 하고 있다구요? 정말이세요? 물론 살다가 닥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앉기는 하지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이 문제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앉았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식음을 잊고 40일을 머무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의 회심 체험 이후에 아라비아로 내려가서 홀로 머물렀습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그게 다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거울 앞에 자기를 비추어보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고달픈 과정을 통해 그분들은 세상의 풍파가 뒤흔들 수 없는 만세반석을 자기들 속에 마련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려고 하고, 자기 속에 있는 행복과 평화를 나누어주며 살게 됩니다.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세상이 다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를 받을 때도 있고, 박해를 받고, 모욕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선의를 가지고 불행한 사람들을 돕다가 그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의 냉랭함에 주눅들었던 사람들은 값없이 주어지는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도 세상을 사랑한 대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도 생명의 길을 전하다가 박해와 시련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신앙적인 주체로 우뚝 선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것을 '고난 당하는 특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풍파를 뚫고 나가려는 용기 없이는 우리 신앙이 자랄 수 없습니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합니다. 하지만 그 배는 배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제 구실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난파선'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고난이 두려워 진리의 선한 싸움을 마다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리키는 진리의 세계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함께 섬

신앙적 주체로 바로 선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협력하고 조화를 이룰 줄 압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에게서 해방된 사람이면서, 동시에 진리와 일치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앞에 주어진 삶의 과제는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료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말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한 마음이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한 마음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탄의 전략은 '나누고 지배한다'(divide and rule)입니다. 사탄이 틈을 탄 공동체는 배가 산으로 가는 격이 됩니다. 갑론을박하면서 다투는 동안 성령의 불꽃은 꺼지고, 하나님의 영은 떠나는 것입니다. 다소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해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협력할 때 교회는 든든하게 서갑니다.

어울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독불장군은 매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울림 속에서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 면에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별명이 참 마음에 듭니다.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 적대자들이 붙인 별명이지만, 그 별명이야말로 예수님의 삶의 특색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울한 종교를 가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 삶은 축제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즐기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술꾼은 아니셨습니다. 고단한 인생들과 기쁘게 어울리셨지만, 한 순간도 당신의 본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和而不同'이라고 합니다. 조화를 이루기는 하지만 남들과 똑같아지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불신과 갈등이 요란하게 표출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신뢰하면서 힘을 합친다면 우리는 큰 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여럿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소리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여럿의 소리로는 할 수 있습니다. 홍수로 무너진 제방을 복구하는 사람들의 단합된 손길이 강의 흐름을 바꾸어 놓듯이, 백성들의 큰 함성에 여리고 성벽이 무너졌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가 된다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벽돌 하나 하나는 높이 설 수 없지만, 벽돌이 시멘트를 매개로 하여 어깨를 나란히 할 때 높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뢰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게다가 우리 뒤에는 하나되게 하는 분,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 멋진 계획에 기쁘게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