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5. 가라지를 뽑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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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13:24-30
설교일시 200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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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를 뽑겠다고?
마13:24-30
(2003/8/31)

농가월령가는 입추·처서 절기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늦더위 있다한들 절서야 속일쏘냐
비 밑도 가비업고 바람 끝도 다르도다.
가지 위의 저 매아미 무엇으로 배를 불려,
공중에 맑은 소리 다투어 자랑는고."

다 틀림이 없는 데, 올해는 '비 밑'이 별로 가볍지 않은 듯합니다. 다행히 오늘은 햇살이 싱그럽지만 그 동안 햇볕을 못 받은 농작물을 보면서 농부들의 한숨이 깊어갑니다.

어느 농부가 밭에 좋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씨앗들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지요? 주인은 하인들과 더불어 정성껏 밭을 돌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추수 때가 가까운 어느 날 하인들은 밭에 '가라지'가 섞여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황한 하인들이 주인에게 달려와 일이 이만저만하게 되었다고 보고를 합니다. 주인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금세 사태는 알아차립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원수가 한 밤중에 몰래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남의 밭에 가라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로마법에는 남의 밭에 가라지를 뿌린 사람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이 비유는 지어낸 것이라기보다는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었을 겁니다.

하인들은 비로소 사태를 깨닫고는 말합니다.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당연한 절차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들을 만류합니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그러면 주인은 가라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저는 이 비유가 혼돈의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주 귀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본래적인 실존

주인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는 말을 저는 지음받은 우리가, 또 세상이 본래는 선하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고 삽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본래 우리가 죄인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라, 지으신 분의 책임일 겁니다. 애초부터 제품에 하자가 있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를 자세히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소중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죄의 어두운 유혹을 받아들였습니다. 죄는 늘 매혹적인 달콤함으로 다가오기에 우리가 단호히 저항을 하지 않으면 죄에게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특색은 '갈라놓는 것'이라 말씀드렸지요?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우리와 다른 이들을 갈라놓습니다. 죄는 함께 도우며 살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무한경쟁에 돌입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홉스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Homo homini lupus)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에게 있어서 지옥'이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본래적 선함을 믿습니다. 매연에 찌든 하늘을 보고 살다가, 어느 날 환하게 개인 서울 하늘을 보면 괜히 마음이 싱그러워집니다. "아, 하늘이 본래 푸른 것이지." 푸른 하늘을 보면 우리 마음조차 맑게 갭니다. 우리의 본 모습은 하늘처럼 맑은 것이었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환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시간 속을 살아가면서 입은 마음의 상처들과 고통 때문에 우리 마음에 굳은살이 박히고, 짙은 구름이 깨끗한 마음을 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본모습에 주목하기 보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 곧 세월에 의해 뒤틀리고 왜곡된 모습을 그의 실체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루돌프 불트만이라는 분은 '죄란 인간이 비본래적(inauthentic) 상태에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청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가 죄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은 본래 어질고 곧은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믿음이 곧 희망입니다. 그런 믿음조차 없다면 우리는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도 없고, 세상에서 희망을 말할 수도 없습니다.


似而非

그러나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런저런 '악'을 경험하며 삽니다. 전쟁과 갈등이 그치지 않고, 폭력과 부패가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탄식시의 기자들처럼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착하게 살면 착한 보상을 받아야 하고 악하게 살면 악한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망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는 영원히 풀기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안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김승희 시인은 <신의 연습장 위에>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병든 물음표,


실감이 나시지요? 시인은 이어지는 연에서 하나님이 세상과 하늘에 대해 가장 붉은 글을 적으실 때, 흰 뼈와 두개골의 가장 무심한 흰 뼈를 그의 연필심으로 바치고, 몸의 다른 부분들은 그저 시간의 강물 위에 눕혀두고 말없음표처럼 평화를 사랑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참 착하게 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 마음이 절로 야박해집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넋을 놓고 있다가는 惡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헤겔은 그것을 '惡無限'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끄러운 행위의 늪 속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농부들이 '잠든 틈'을 타서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렸다고 말합니다. 잠들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수들이 우리 마음에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하와는 뱀의 속삭임에 넘어갔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달콤한 속삭임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은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우리 속에 파고듭니다.

우리가 또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가라지 모양이 밀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다 자라기까지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가라지는 似而非입니다. 비슷하지만 아니니까요. 사이비들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곧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맑음과 착함, 그리고 소명을 소홀히 여길 때 슬쩍 우리 곁에 다가섭니다. 물론 우리 영혼을 노략질하기 위해서지요. 사이비들이 주로 기생하는 곳은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욕망'입니다. 사이비 종교들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그들의 영혼을 도둑질하고, 재산까지도 도둑질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을 확대 재생산합니다.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지요.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종교는 가짜입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면서, 그 욕망을 채우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들이 하려는 것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배권 아래 두려는 것입니다.


희망의 뿌리

요즘 우리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보면 참담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저 남산에서 서울을 굽어보시면서 울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 확 뒤집혔으면 좋겠습니다. 하인들이 주인에게 한 말이 이해가 됩니다. "가라지를 뽑아낼까요?" 하지만 주인은 그냥 버려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가라지의 존재를 몰라서도 아니고, 그것을 귀히 여겨서도 아닙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때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들을 보면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사실 이런 욕구에 굴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맘에 맞지 않는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시원하겠지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서로를 밀쳐내기 위해서 우리 마음에서 솟아 나온 어둠과 미움이 결국에는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 아닐까요?

절대적인 선이 어디 있으며, 절대적인 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라지를 뽑아내겠다고 무모한 용기를 보이다가 곡식까지 뽑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손을 놓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비판도 하고, 시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싸우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악을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쉽게 지치게 됩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질 않습니다. 가라지는 추수 때에 주인께서 처리하실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깨끗함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유학에서는 '性'이라고 합니다. 본성, 혹은 본래성이란 말입니다. 이 '성'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하루하루를 정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성의 삶'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정성 '誠'으로서의 성의 삶입니다. 또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뜻에서 술깰 '醒'으로서의 성의 삶입니다. 또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향한다는 뜻에서 거룩할 '聖'으로서의 성의 삶입니다.

어거스틴은 '악은 선의 결핍'이라 했습니다. 알곡이 힘을 못쓰면 가라지가 기승을 부립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바란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름다워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열리는 세계입니다. 꾀꼬리가 하나님께 개구리의 울음소리 때문에 자기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라고 부름받았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는 가라지가 자라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탄식만 하지 말고, 어두운 세상을 밝힐 책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스스로 밝아지려고 애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