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6. 진정한 현실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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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11:45-53
설교일시 200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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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현실주의자
요11:45-53
(2003/9/7)


위태로운 균형

나사로를 소생시킨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에게 쏠리자 지도자들은 그것을 매우 위험스레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해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했습니다.


"이 사람이 많은 기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47b-48)


그들이 예수를 위험시하는 까닭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민중들의 시선이 집중되면 그것은 곧 정치적인 열정으로 바뀔 수 있고, 결국에는 로마인들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 경험 많은 그들의 판단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인물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좌우할 뇌관처럼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힘의 역학 관계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대략 네 방향의 힘들이 힘 겨루기를 하면서 위태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질적인 지배자인 로마, 로마에 기생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했던 헤롯 일가, 산헤드린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무장혁명으로 로마를 몰아내려는 열혈당원 등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힘의 벡터를 형성한 채 균형상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자기 자리를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정치인들이 어떤 때는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다가도, 어떤 사안 이를테면 세비를 올린다든지, 면책특권을 이용해 국회의원을 보호한다든지 하는 일에 있어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 걸 '정책 공조'라 한다지요? 정치란 참 묘한 것입니다.

성서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그런 다양한 힘의 벡터가 평형을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불온시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힘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정해놓은 놀이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들은 매우 당황스러워 합니다. 춤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의 춤판에 끼어 들지 않고, 새로운 스텝의 춤을 추셨습니다. 이게 그들을 자극했습니다.


희생양 만들기

세상의 춤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각자 무대의 주역이 되려고 팔꿈치로 이웃들의 옆구리를 밀쳐댑니다.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힘과 계략입니다. 그러니 그 무대 위에서 추는 춤이 흥겨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춤판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무대 밖으로 쫓겨나 체념하고 살거나,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새로운 춤판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미 삶의 잔치는 끝났다고 주저앉은 이들을 붙잡아 일으키고, 그들에게 신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기존의 체제가 그들에게 붙여준 죄인의 멍에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이들이 예수와 함께 새로운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연주하시는 우주의 리듬을 타고 신명나게 구원의 춤을 추었습니다. 예수가 있는 곳에서 물은 포도주로 바뀌고, 죄인은 성자로 바뀌었습니다. 미움과 경쟁, 폭력 그리고 음모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사랑과 비폭력, 돌봄, 나무, 섬김의 새 삶을 살았습니다.

지도자들은 불안했습니다. 백성들이 깨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못하면 체제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한 믿음'을 '국가의 와해'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가 세상에 있는 한 사람들은 점점 깨어날 것이고, 그러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숨죽인 채 살아가던 이들이 꿈틀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가뜩이나 위태롭던 사회적 균형은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때 노회한 정치가이자 그해의 대제사장이던 가야바가 느릿느릿 입을 엽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50)


경험이 많은 그는 한 사람이 희생되면 전체가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솔깃한 제안입니다. 성서는 그가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백성 전체를 위해 죽으실 것을 예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저는 가야바를 보며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야바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도, 한 생명의 소중함도 아닙니다. 기득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제안이야말로 유일한 선택이라고 믿어버립니다. 현실이 그래서가 아니라, 그래야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가장 현실주의적인 선택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야바는 '백성을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 믿어지십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요?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제 욕심을 차리느라 혈안이 된 사람들이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국민을 위하여'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가야바가 말하는 '백성'이나 '민족'은 나라 전체가 아닙니다. 기존 체제하에서 기득권들을 누리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똑같지요? 많은 사이비 지도자들이 아름다운 말을 선점하여 오염시켜 버립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씀드려야겠네요. 가야바의 말은 공의회 회원들에게 매우 타당성이 있는, 아니 가장 현실주의적인 해결책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예수를 처형하는 것으로 무너지는 체제를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역사의 주역을 자처하면서도 한가지를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고 깊다는 것을 그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되치기

예수님은 결국 그들의 음모로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처럼 보였고, 예수님이 추구했던 참 이스라엘의 회복은 좌절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되치기의 명수이십니다. 요셉의 불행을 가족들의 구원이라는 열매로 바꾸시고, 헤롯의 완고함을 이스라엘의 해방의 동력으로 바꾸시고, 참혹한 십자가를 구원의 문으로 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사라지면 백성들도 잠잠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죽으심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냈습니다. 며칠 전 김승훈(마티아) 신부님이 善終하셨습니다. 그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폭로함으로써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분입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 젊은이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역사 변혁의 거대한 동력으로 바뀔 줄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우리는 다만 '모른다'고 해야 옳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받드는 것일 뿐, 결과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새로운 삶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지도자라 자부하는 이들이 세워놓은 삶의 규칙에 따라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힘을 보았습니다. 그 것은 지배하고 억누르는 힘(force)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고 세워주고 긍정하는 내적인 힘(power)이었습니다. 그 힘 앞은 사람들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기쁘게 그 힘 앞에 나아갑니다.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참 삶의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바울의 이 고백은 아주 근원적인 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세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세상 이면의 질서를 보며 삽니다. 현실은 한 겹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들만이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땅 밑으로 지하수가 흘러 땅을 지탱하듯이, 눈에 보이는 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현실은 여러 겹입니다. 가야바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예수라는 '현상'만 보았습니다. 그가 가리키고 있는 더 깊은 세계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눈 먼' 인도자들이었습니다. 가야바의 현실주의는 어리석은, 피상적인, 파편적인 현실주의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현실주의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지향하는 삶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일치하는 선택을 하셨기에 그는 진정한 의미의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인격에서 비롯되는 내적인 힘에 매료된 사람들입니다. 그 힘에 붙들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혼란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파이프를 박아 지하수를 퍼올리듯,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무궁무진한 생의 보물들을 길어 올려, 스스로 목마름을 해결할 뿐 아니라, 다른 목마른 이들에게도 시원한 샘물을 안겨주어야 합니다. 갈등과 폭력과 음모가 지배하는 것 같은 세상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만들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현실이 만만치 않다구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현실에 떠밀리다가도, 몸을 곧추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진정한 현실주의자,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동행하면서 세상의 인력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