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7. 용자(勇者) 요나단
설교자
본문 삼상14:43-46
설교일시 200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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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勇者) 요나단
삼상14:43-46
(2003/9/14)


벼랑 끝에 선 사울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은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나라의 기틀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는 의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암몬족들이 동족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핍박하고 모욕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떨쳐 일어나서 적들을 몰아냅니다. 그런 행위의 내적인 계기를 성경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해서'라고 말합니다. 그 일로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존재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전세대의 지도자인 사무엘은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서고, 수줍음 많고 겸손했던 사울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꽃방석처럼 화려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외의 커다란 문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먼저는 사무엘과의 관계설정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던 그였건만, 사무엘은 사울이 제멋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백성들은 사무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울을 의혹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경제적 상황도 매우 열악했습니다. 우리는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다"(삼상13:19)는 구절에서 그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철제 무기를 가진 사람이라야 사울과 요나단이 고작이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매우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블레셋의 군사적·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가 무뎌지면 그것을 벼리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는 말이 이스라엘의 처량한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도구의 차이는 곧 생산력의 차이이고, 생산력의 차이는 곧 국력의 차이임을 박범희 선생님을 통해서 아주 생생하게 배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블레셋이 쳐들어왔습니다. 무기체계는 물론이고, 병력과 지형까지도 이스라엘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울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겨우 600명인데 반해, 블레셋의 전투병은 압도적입니다.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삼상13:5) 지형적으로도 블레셋은 천연의 요새인 믹마스에서 이스라엘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스라엘이 믹마스를 치려면 보세스('번쩍거리는 것', '미끄러운 것')와 세네('가시, 찌르는 것')라는 험준한 바위를 통과해야 합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참 암담한 상황입니다. 우리 시대의 소리꾼인 장사익이 부른 <삼식아>라는 노래의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이 겪어온 난감한 상황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건 불러야 제맛인데, 제가 재주가 없으니 좀 밋밋하더라도 상상력을 발휘해서 잘 들어보세요.


소낙비는 내리구요.
업은 애기 보채구요
허리띠는 풀렸구요
광우리는 이었구요
속코팽이 놓치구요
논의 뚝은 터지구요
치마폭은 밟히구요
시어머니 부르구요
똥오줌은 마렵구요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그저 주저앉아 아이처럼 발을 버둥거리며 울고 싶습니다. 그래도 살아야지요. 그게 인생이지요. 난감하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요.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상처가 너무도 깊습니다. 많은 이들이 실의에 잠겼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가슴이 찡해지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어 말없이 어구들을 정리하는 어부와, 밀려든 토사에 묻힌 벼 포기를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는 농부의 주름진 얼굴이었습니다.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삶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용기가

본문으로 돌아가지요. 중첩된 어려움에 사울은 거의 넋이 나갔어요. 그렇게도 용감했던 그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지요. 두려움은 우리 영혼을 마비시키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은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마비 상태를 깨우치지 않으면 멸망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떨쳐 일어납니다. 그는 자기의 병기 든 소년에게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다."(삼상14:6) 독려하면서 블레셋의 진영으로 나아갑니다.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두렵다고 하여 그저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만일 자기가 몸을 드러냈을 때 블레셋 초병들이 쳐내려오지 않고, 자기를 보고 올라 오라 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요나단이 은신처에서 몸을 드러내자 블레셋 초병들은 그를 가볍게 여겨서 가까이 다가오라고 외칩니다. 요나단은 그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로 생각하고 적진에 올라가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그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으면 성경은 그 대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군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삼상14:15)


성경은 은근히 하나님이 일으키신 두려움이 적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브아에 있던 사울의 부하는 적진에서 엄청난 소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사울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사울은 군사들을 점고한 끝에 요나단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는,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라고 명합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에,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은 법궤가 자기들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더욱 급박하게 되자 사울은 법궤 모셔오는 것을 중단시키고 전쟁터로 달려갑니다. 그곳에서 사울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혼돈에 빠져 서로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블레셋 사람들의 노예신세가 되었던 히브리인들이 떨쳐 일어났고, 에브라임 산지에 숨어서 눈치만 보고 있던 사람들도 무기를 들고 블레셋을 치러 왔습니다. 밑에서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위에서는 산지인들이, 안에서는 히브리인들이 들고 일어나니, 블레셋은 자중지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깨어있는 한 사람이 두려움 속에 움츠러들었던 사람들의 용기를 깨운 셈입니다.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봄이 멀지 않았음을 깨우치기는 한다지요? 자유는 늘 요나단과 같은 이들의 용기를 통해 역사 속에 유입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맹세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울은 전투에 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끌어내기 위해서, 군인들에게 제의적인 금식을 명했습니다. 그는 금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것이고, 그 결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믿음, 요나단의 믿음

하지만 그 생각은 오산이었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기운을 차릴 수 없었고, 사기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군인들은 수풀 사이에서 벌꿀을 발견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이야기꾼은 이 대목에서 요나단이 사울의 금기를 어겼다고 전합니다. 사울이 맹세할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명령을 알지 못한 요나단이 벌꿀을 찍어 먹었다는 것입니다. 맹세한 날이 지나자 굶주림과 피곤에 지친 군인들이 짐승들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도살하고 피 있는 채로 먹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이 명한 제의적인 금기가 오히려 더 큰 일탈을 부추긴 셈입니다. 사울은 급히 큰 돌을 취하여 그것을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서만 짐승을 잡아먹으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침이 밝아왔을 때 전날의 승리에 도취한 사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전투를 개시할까요 여쭙습니다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은 즉시 누군가가 맹세를 깨뜨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사람을 찾습니다.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맹세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제비뽑기에서 걸려나온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요나단이지요. 요나단은 왕 앞에 나가 어제 있었던 일을 다 고합니다. 그리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맹세를 어길 수 없어 요나단을 죽이려 합니다. 그 순간 백성들이 들고 일어섭니다.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14:45)


놀라운 반전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일한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중들의 지혜입니다. 인습적인 신앙에 따라서만 처신하려 했던 사울보다, 역사의 시급한 요구에 응답하면서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요나단의 길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급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법궤를 찾고, 병사들을 독려해야 할 때에 그들을 종교적 금기로 묶어놓는 사울의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꾼은 두려움을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 자기를 던진 요나단에게서 더 큰 믿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사(?)하는 믿음

"그가 오늘 하나님과 同事하였음이니이다." 요나단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의 마비상태를 깨기 위해 강대한 적 앞에 홀로 섰습니다. 그의 용기와 헌신이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초석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凍死'해버린 영혼들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비록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암담하다 해도, 우리는 절망과 낙담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내달아야 합니다. 새 세상을 이루는 일은 나 아닌 누군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우리들이 그 일에 나서야 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결과가 신통치 않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동사'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