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38. 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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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12:1-3
설교일시 200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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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히 12:1-3
(2003/9/21)


내 고개 부러지겠다, 참새야

비 내리는 오후 어디 마땅히 갈 데도 없고, 책도 읽히지 않아서 어린이 도서관에 들러 손에 집히는 대로 책 한 권을 뽑아들었습니다. 동시집이었는데 여기저기 넘기다가 눈에 들어오는 시 몇 개를 읽었습니다.


하루종일 비가 서 있고
하루종일 나무가 서 있고
하루종일 산이 서 있고
하루종일 옥수수가 서 있고

하루종일 우리 아빠 누워서 자네
―<비오는 날>


비가 내려 나가 놀지도 못하는 아이는 무료합니다. 그래서 툇마루에 앉아 발을 간둥거리며 주위를 우두커니 둘러보았겠지요.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마치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고보니 나무도, 산도, 옥수수도 서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 방 한 켠에선 아빠가 누워서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 광경을 그린 마지막 대목을 보면서 저는 이 동시의 작가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전환에 감탄했습니다. 수직적인 이미지를 돌연 수평적인 이미지로 전환시켜서 웃음을 유발하니 말입니다. 또 다른 시 한 편이 눈에 띄었습니다.


참새가 수수 모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아이고 무거워
내 고개 부러지겠다 참새야
몇 알 따먹고
얼른 날아가거라
―<참새와 수수 모가지>


어린 시절 농촌에서 보았던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참새가 수수 모가지에 턱 걸터앉을 게 뭡니까? 그렇지 않아도 잔뜩 숙어진 수수 모가지가 더욱 숙어졌습니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수수가 하는 말을 듣습니다. "몇 알 따먹고 얼른 날아가거라". 참 좋지요? 다른 이를 위한 여백 없이 각박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 같으면 '썩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을 법도한데, 수수는 '몇 알 따먹고' 가라고 말합니다. 자기 모가지에 걸터앉은 참새에 대해 아무런 미움도 적대감도 없습니다. '내 고개 부러지겠다 참새야' 하는 대목에서는 장난스런 엄살이 읽힙니다. 이 시에는 뭔가 조화로운 삶의 분위기가 드러납니다.

뒤늦게 책표지를 보고서야 그것이 어린이들의 시가 아니라 섬진강변에 살고 있는 김용택 시인의 동시임을 알고는 다소 머쓱해지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아이처럼 살고 있는 시인의 맑은 심성이 빚어낸 시이기에 여전히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고, 워즈워드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했습니다. 어른들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요? '놀이정신'이 아닐까요? 놀이란 즐거운 것입니다.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잘 놀 줄도 모르고, 즐길 줄도 모릅니다.


갖고 싶은 것이 적은 사람이 부자

기왕 살 것 즐겁게 축제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만만치 않고, 자식 교육도 걱정이고, 인간관계의 어려움도 있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뭘 위해 이렇게 바장이며 사나" 싶어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매사를 너무 진지하게 대합니다.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도, 기어코 시시비비를 가려보려다가 상처를 입거나 입힙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은 감옥이 되고 맙니다. 무거움을 벗어나려면 수직의 심상을 수평의 심상으로 전환했던 동시 작가의 경쾌함을 배워야 합니다. 물위를 걸으셨던 예수님의 그 가벼운 보행법을 배워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파도가 잦아들지 않는 인생이지만, 그 속에 빠지지 않고 그 위를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방법이 없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쭉 열거한 후에, 이런저런 시련의 풍랑에 떠밀리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1)


물위를 걷기 위해서는 먼저 가벼워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온갖 시련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히브리서의 저자는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들을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라고 권고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존재는 아닙니다(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찾는 나그네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때가 되면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돈도 명예도 잠시 우리 곁에 머물다 떠나가는 것들입니다. 떠나려는 것을 굳이 붙잡으려니 삶이 힘겹습니다.

우리 인생이 무거운 까닭은 바라는 것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그 동안 저는 나눌 것이 많은 사람이 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달리 말해보고 싶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적은 사람이 부자입니다. 소유를 늘림으로 부자가 되는 길은 곳곳이 암초투성이여서, 그 길에 서있는 한 삶이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욕망을 줄이면 우리는 작은 일에도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은 '반드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거의' 죄에 얽혀들게 마련입니다. 집착이 강한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고, 생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모가지에 앉은 참새를 보고 '몇 알 따먹고 얼른 날아가라'고 할만한 정신의 여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그릇이 커질수록 감사와 평안은 멀어집니다. 얼굴에서 미소도 사라집니다. 다른 이에게 친절할 수도 없습니다. 이건 그 자체로 형벌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을 줄여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욕망의 그릇을 작게 할수록 우리 존재는 건강해집니다. 그래야 우리는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卽有證無

할 수 있다면 예수님처럼 세상 물결 위를 가뿐하게 걷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드로처럼 가라앉곤 합니다. 욕심을 덜 부리고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보지만 세상은 마치 목동들이 올가미를 던져 소를 넘어뜨리듯이 수많은 올가미로 우리를 넘어뜨리곤 합니다. 세상의 휘황한 빛에 취한 눈에 하늘의 별빛은 보이지 않게 마련입니다. 세상의 온갖 소리에 익숙해진 귀에 하늘의 세미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타락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슨 소리를 들으며 삽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2a)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은 자기를 깨는 아픔을 견디면서 이 땅에서 하늘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참 평화와 빛을 욕망으로 어둑해진 이 세상에 끌어들이셨습니다. 부와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악마적인지를 드러내면서, 나눔과 섬김이야말로 하늘에 이르는 길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 되셨고, 그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생을 완성으로 이끄는 분이 되셨습니다.

누구를 바라보고 사느냐가 우리 인생을 결정합니다. 똑같은 길을 걸어도 사람마다 보는 것이 다릅니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런 걸 가리켜서 '선택적 지각'이라 한다지요? '바라봄'은 '바라는 것, 즉 소원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꿈꾸는 바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바라보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말과 행실이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 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나를 본 자는 예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卽有證無'라 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예수의 실체를 드러내는 향기입니다. 이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야말로 정말 잘사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홍수에 밀려온 토사를 말없이 걷어내는 이들의 꾸준한 손길처럼, 욕심의 부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덜어내며 살다보면 우리도 어느새 가뿐하게 세상 물결 위를 걷고 있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길 위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