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0. 생명은 생명을 먹는다
설교자
본문 고전11:23-26
설교일시 200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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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생명을 먹는다
고전11:23-26
(2003/10/5, 세계성찬주일)


인간에 대한 연민

방글라데시 청년 모나에게는 어머니가 두 분 계십니다. 한 분은 그를 낳아주신 분으로 방글라데시에 계십니다. 또 한 분은 수원에 살고 계십니다. 그분을 모나는 '수원 엄마'라고 부릅니다. 6년 동안의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모나는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견디게 해준 수원엄마의 사랑을 회상합니다. 6년 전 그는 가난한 집안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푸른 꿈을 안고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어렵게 일자리를 얻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레스에 손이 눌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보상조차 받기 못했기에 그는 치료조차 변변히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국 땅에서 겪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왈칵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관상용 물고기를 부화시키는 양식장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어떤 일인지, 또 그곳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몰라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수족관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얘, 너 배고프지?"

실제로 그는 몇 끼니를 굶고 있었습니다. 그 말이 상기시키는 서러움 때문에 그는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딱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아주머니는 정성스럽게 밥을 지어 내왔습니다. 울컥 서러움과 감동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을 삼키며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가 먹은 것은 단순한 밥이 아니라 희망이었고, 인간에 대한 신뢰였고 감사였습니다. 그때부터 주인 아주머니는 '수원엄마'가 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낯선 청년에게 밥 한 끼를 차려내는 그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요? 히브리서 13장 2절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자기집 문 앞에 당도한 나그네 행색의 천사들을 영접한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되지만, 저는 아브라함의 모습에 이 아주머니의 모습이 겹쳐짐을 느낍니다.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차려낸 밥 한 상이 한 존재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불신과 두려움을 신뢰와 사랑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모나 앞에 차려진 것은 밥상이 아니라 성찬상이었던 셈입니다.


인생은 고마움이구나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만,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신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농사를 지으시던 분들이 서울에 오셔서 할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어머니는 함지에 김이며, 멸치며, 뱅어포 같은 것을 이고 다니면서 흑석동 산 동네에서 장사를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정직한 땀흘림으로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어머니가 이고 다니시는 함지가 늘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힘든 노동의 결과인지 어머니의 양쪽 장딴지에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정맥류(靜脈瘤)를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힘겨운 일상이었음에도 어머니는 신앙생활에서 큰 힘을 얻곤 하셨습니다. 늘 반쯤 엎드린 자세로 바닥에 놓인 성경을 들여다보시며, 붉은 색 볼펜으로 성경에 밑줄을 그으시던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타령처럼 이어지는 어머니의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뭐가 저리도 좋으신가?' 못마땅해한 적도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어서 저는 욕망을 유보하는 일에 매우 익숙합니다만, 그래도 어떤 충동에 휩쓸려 뭔가를 갖고 싶어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어지간히도 어머니를 들볶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떠오르는 것은 축구화 한 켤레와 유니폼 한 벌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의 속곳 주머니 깊은 곳에서 나온 꼬깃꼬깃한 돈으로 그것을 사들고 들어와 철없이 좋아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도 함께 좋아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야 그 돈이 어머니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부인이 돌아가시자 <<씨 의 소리>> 권두언에서 부인을 추모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그 분의 별명은 '나야 뭘'이었답니다. 이게 어머니들의 삶이겠지요? 한 평생은 자기를 지우며 사신 생 말입니다. 자기의 욕망, 자기의 꿈보다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어머니의 삶이야말로 거룩한 삶이 아닐까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높지만 그때만 해도 그게 그분들의 생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삶이라는 게 결국은 누군가의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요4:37)는 말씀이 요즘처럼 실감날 때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노력한 것을 누리며 삽니다. 의식주 어느 것 하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아, 인생은 고마움이구나.' 이 깨달음을 얻으면 생이 달라집니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고맙고, 사용자는 노동자가 고맙습니다. 스승은 제자가 고맙고, 제자는 스승이 고맙습니다. 고마움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이 소중한 것은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생명이라는 게 누군가의 사랑과 정성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치루어야 할 죄의 대가를 주님이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빌립보서에 나오는 바울의 '겸비의 그리스도론'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물처럼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생 전체를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선언을 듣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주님은 영적으로 무능해진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해 당신의 살과 피조차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보다 더 큰사랑은 있을까요? 우리가 그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옛 사람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 성찬상은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이고, 예수적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연민과 사랑으로의 초대입니다. 이것은 방글라데시 청년 노동자 모나 앞에 차려진 것보다, 어머니의 피와 땀과 눈물보다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덕분에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고마움이 있다면, 나의 생명이 사랑의 빚임을 안다면, 이제 우리 삶은 사랑에 대한 빚 갚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인연의 끈으로 묶여진 사람들에게 더운 밥 한 상을 차려내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의 매순간마다 주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