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1. 잃어버린 형상을 찾아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3:25-26
설교일시 200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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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형상을 찾아서
행3:25-26
(2003/10/12)


잃어버린 순수

살다보면 문득 내 모습이 낯설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인지, 아주 다른 곳으로 와 버린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올 때는 정말 난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안다"(요8:14)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너나할 것 없이 사람은 누구나 시간의 거센 풍랑과 싸우느라고, 애초에 우리에게 있던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다면서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대개 과거를 돌아보는 우리의 시선은 애틋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도 눈이 맑은 때가 있었지', '나도 세상의 고통에 민감하던 때가 있었지', '나도 현실보다는 꿈을 먹고 살던 때가 있었지', 돌아보면 살아온 날들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매일 거울을 한두 번은 들여다보게 마련인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만족스러우세요? '오, 언제 봐도 멋있어!'. 이런 분은 증세가 좀 심각하기는 하지만 마땅히 치료방법도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어야겠지요. 저는 제 모습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어요. 괜히 미안해져서 눈길을 슬쩍 피할 때도 있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데, 내 모습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찾기가 어려우니 말이에요. 물론 하나님의 형상은 겉모습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의 얼굴은 '얼의 골짜기'라지 않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우리의 모습은 우리 영혼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게 마련입니다. 오리들 틈에서 자란 독수리는 하늘을 날지 못한다지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거지요. 우리는 죄와 욕심의 새장에 갇힌 채 그것을 우리의 하늘로 알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겨우 밥 벌어먹고 살라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구약성경에서 '죄'를 뜻하는 단어 '카타'(chatah)는 과녁을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궁수가 화살을 쐈는데, 그만 화살이 과녁을 향하지 않고 엉뚱한 데로 날아간 거지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 젊은이가 정색을 하면서 그렇다면 문제는 화살이 아니라 궁수의 솜씨가 아니냐고 묻더군요. 그럴 듯한 문제제기입니다. 하지만 궁수이신 하나님은 그 화살에게 자유를 허락해주셨어요. 과녁을 향해 날아가느냐 비껴가느냐, 방향을 정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상하게도 어둡고 음습한 욕망에 끌려가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중력처럼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런 욕망을 요한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이라고 요약합니다. '원죄'라는 말은 우리 속에 있는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성향 혹은 끌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그런 죄의 인력에 끌려가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일 겁니다.


돌이킴의 길

성서는 온통 '회개하라'는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예수님의 첫 번째 외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성령강림 이후에 한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도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3:19)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회개란 돌이킴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어쩌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부단한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회개는 기도원에 가서 날밤을 새우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회개는 자기가 정말 문제임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을 치료할 때 전환점이 되는 것은 당사자가 자신의 병적인 증세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회개할 마음이 없다면, 자기 스스로가 문제임을 알지 못한다면 회개라는 말조차 무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자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유대교는 그 방법을 몇 가지 가르쳐줍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물론 이때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의미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마음을 다하여 구하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많은 것들을 구하지만,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둘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울타리를 넘어 다른 이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픔과 슬픔을 줄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슬픔보다 더 넓은 공간은 없고, 피 흘리는 슬픔에 견줄 우주는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넘치고 있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연민과 그것을 줄이기 위한 창조적인 노력이야말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아주 소중한 통로인 것입니다.

셋째는 공부와 깨달음입니다. 유대인들은 늘 열린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공부란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지금의 자기는 초극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자기 한계를 아는 사람은 항상 배움을 통해 더 깊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려 합니다. 모든 강물이 흘러 바다로 향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심'

하지만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죄의 인력은 우리의 의지로 벗어나기에는 너무나 강력합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정말 괴로워했던 한 사나이의 처절한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죄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걸 운명이려니 하고 그저 그런 대로 살아야 하나요? 때로는 하나님도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접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하지만 정말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엄부의 모습으로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하시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한가지 면에서는 무능하십니다. 그것은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일일 테니까요. 독생자 아들까지 보내주신 사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이 적대감에 가득찬 것으로 보이는 세상을 이길 힘의 근원입니다.

저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표현한 렘브란트의 "방탕한 아들의 귀향"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환해집니다.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덥썩 안고 있는 아버지의 두손은 하나는 강하고 남성다운 손이요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여성적인 손입니다. 아버지의 눈은 감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지친 젊은 육체를 감촉으로 느끼면서 그저 품안에서 쉬도록 해줍니다. 아버지의 널찍하고 붉은 망토는 연약한 새끼들을 감싸는 어미새의 두 날개입니다. 그분은 아들의 과거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뿐입니다.


어울림의 삶을 통해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밀한 속사정을 나눌 수 있는 절친한 동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사렛의 산골처녀 마리아가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엘리사벳입니다. 엘리사벳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늙으막에 아기를 잉태한 터였습니다. 믿어줄 줄 모르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냉소적인 세상에서 두 여인은 서로에게 주어진 약속을 확인하고 인정합니다.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앞을 볼 수 없게 된 바울에게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보내주십니다. 바울이 유럽의 첫 번째 도성인 빌립보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루디아라는 여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별적으로 부르셨지만, 언제나 당신의 선택이 결실을 이루도록 우리가 함께 어울리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파송을 받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도 둘 혹은 셋이서는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끓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서로에게 지체가 되어 줌'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교회는 혼자서 빨리 가는 사람보다는 더디지만 함께 갈 줄 아는 사람들에 의해 아름답게 성장합니다. 내가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있고, 내가 못 다하면 그것을 이어서 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보다 더 든든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영혼에 달라붙은 녹을 말끔히 벼려내는 숫돌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비판과 정죄의 시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오래 참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세상이 참 어지럽습니다.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합니다. 같이 허둥대거나 소리를 질러대면 안 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은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옭매고 있던 탐욕과 이기심의 너울이 벗겨지면, 우리는 삶이 은총임을 순간마다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 즉 다른 이를 복되게 하라는 소명을 기쁨으로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그를 복되게 함을 통해 우리는 영생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런 소망으로 우리의 삶이 날마다 더욱 맑아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