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2. 삶은 계속된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45:1-5
설교일시 200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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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속된다
렘45:1-5
(2003/10/19)


 우울한 세상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습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면 일상의 속박을 벗어나 어딘가로 멀리 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어디 좀 다녀오셨는지요? 그런데 정말 좋은 시절을 지나면서도 우리 마음은 그리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재신임을 둘러싼 정치권의 소용돌이가 한반도를 휩쓸고 있습니다. 여야 할 것 없이 정쟁에 여념이 없습니다. 욕설과 험담, 거짓말과 안하무인, 손가락질과 오만, 그리고 저질스런 폭로가 의사당을 휩쓸고 있습니다. 이라크 파병 문제도 슬그머니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진중공업 노조 지회장 김주익 씨가 크레인 꼭대기에서 129일 동안 농성을 하다가 그만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메아리 없는 세상을 향한 최후의 외침인 셈입니다. 이민 행렬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원정 출산 이야기도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먹고 살길은 막막하고,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은 점점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30대들도 직장에서 언제 쫓겨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고, 아예 직업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체감 경기는 여전히 한 겨울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흔히 탈출구를 찾습니다. 술과 도박, 마약, 그리고 쾌락에의 탐닉이 그것입니다. 최근에는 일상의 삶에 권태를 느끼는 부부들이 부부들의 성을 맞교환하는 스와핑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음란과 사치가 사람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홧김에 불을 놓아 애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옆으로도 언제부터인가 고기집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이면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그 속을 걷노라면 기분이 착잡해집니다. 지글거리고 있는 고기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사람들의 표정은, 신명난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뭔가에 찌들린 표정들입니다. 그들이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는 고깃점들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과 외로움처럼 보입니다. 저는 전도서 기자의 우울한 탄식을 듣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1:8)


삶이라는 게 본시 그런 건가요? 이런 우울한 세상에서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세상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은 힘겹습니다. 그런데도 삶은 계속됩니다. 태풍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도 밤이 지나면 아침이 밝아옵니다. 그분들은 어쩌면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던 욥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차라리 정신을 놓아 버리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이 잔인한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저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룩의 예를 통해서 그 해답의 단초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어려운 시절

네리야의 아들(렘32:12)인 바룩은 예레미야의 비서입니다. 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인 스라야가 시드기야 임금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통해 접하는 바룩 가의 사람들은 매우 경건하고 용감합니다. 비록 나라는 무너졌어도 외적인 어려움이 그들의 정신조차 무너뜨릴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룩은 위대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신탁을 받아 기록한 후 그것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백성들 앞에서 낭독하곤 했습니다. 그 내용은 바벨론의 1차 침공이 지난 후 '이제는 별 일 없겠지' 하면서 안도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바벨론이 다시 침략해 올 것인데 그때는 예루살렘이 철저히 파괴되리라는 경고였습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첫 번째 예언서가 격노한 왕 요아킴에 의해 불에 태워졌을 때(렘36)에도 좌절하지 않고, 예레미야의 구술에 따라 두 번째의 예언서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간한 역경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강철같은 의지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동족들이 겪는 참상을 목격하고는 강철같던 그의 의지도 흔들린 것 같습니다.


슬프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치 못하다(45:3)


그가 개인적으로 겪는 고통은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 참혹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희망의 기름은 다 말라버렸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두려움과 절망감의 어둠이 들어앉았습니다. 그는 슬픔의 감정에 압도당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의 입에서는 한숨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희망을 잃은 그의 영혼은 깊은 피로감에 젖어들었고, 불안함은 가시질 않았습니다. 분명 그러한 상황은 예견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앞에서 전개되는 참혹한 현실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눈을 뜨라

그런 그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다(45:4).


하나님은 바룩을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달콤한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구체적인 현실에 사로잡힌 그의 눈을 높이 들어올리라고 하십니다. 눈앞에 있는 장애물에만 골똘하다보면 그 장애물은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우리 눈을 들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옛말에도 "뜻 같지 않은 일이 늘 열에 여덟 아홉"(不如意事 十常八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사 뜻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열에 한두 번 찾아올까말까 한 그 득의의 순간을 기다리며 수굿이 참아야 합니다. 높은 곳에서, 혹은 멀리서 바라보면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이라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비록 바벨론은 강대해 보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망해버린 것처럼 보여도,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심은 것을 뽑기도 한다'. 나찌의 폭압정치에 절망했던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이 말씀과 접하는 순간, 자기 속에 어떤 뜨거움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지금 비록 어둠이 지극하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승리할 것입니다. 함부로 절망하고 탄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바룩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45:5)


지금 당장 세상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앙앙불락(怏怏不樂)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바울 사도의 이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늘 명심해야 합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두려움과 절망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마련입니다.


 은총을 머금은 자의 삶

저는 현실이 답답할 때마다 친구인 고진하 목사의 시 <파릇파릇한 쟁기질>의 한 대목을 떠올립니다.


네 시린 등짝에 얹힌 멍에 무거워 괴로울 땐,

홍천 땅 늙은 양순 애비
두 마리 소에 빛나는 쟁기를 메워 돌 많은
황톳빛 산비알 밭을 갈던 땀 밴 풍경을 그려보아라


시인은 삶이 힘겹다고 투덜거리는 우리에게 돌 많은 산비알 밭을 갈아엎는 양순 애비의 싹싹한 갈음질을 새겨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원망만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면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좋은 것을 나누고, 어려운 이들을 보살펴주는 일에 마음을 쓰다 보면 절망의 감정조차 사치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절망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제방을 무너뜨리는 것은 자그마한 구멍 하나입니다. 단단한 얼음을 깨뜨리는 것은 작디작은 바늘입니다. 우리의 작은 시작을 완성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이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나의 이기적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전심전력하는 사람은 절망을 거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런 약속을 해주십니다.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 같게 하리라."(45:5)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동행하시면서 보호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 이 말씀을 꼭 붙들고 절망의 심연을 박차고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울한 세상을 건널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이 우울한 세상에 희망과 빛을 가져가라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낙심한 이들의 벗이 되라.
세상의 불의에 맞서되,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라.
먼저 섬기고, 먼저 나누어 주라.
먼저 용서하고, 먼저 다가서라.
분리의 담을 헐고 하나됨의 길을 택하라.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지 말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라.


이 소명에 응답하는 순간부터 우리 어깨를 짓눌렀던 생의 무게는 줄어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가을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머금어 안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으로 세상을 환히 밝히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03년 10월 19일 19시 51분 0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