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3. 아론의 종교를 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32:30-35
설교일시 2003/10/26
오디오파일 031026_s.mp3 [1065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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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종교를 넘어
출32:30-35

Here I stand!

엊그제 신문을 보셨는지요? 온라인에서 개신교 반대운동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와있었습니다. 개신교의 행태를 비판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이트가 10여 개가 넘고, 클럽 '안티 기독교'는 지난 3일 한강시민공원에서 회원 4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각종 플래카드와 사진자료를 전시하면서 반기독교 활동을 오프라인으로 확대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8월 회원들의 글을 모은 <우리는 왜 기독교를 반대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자까지 발간했다더군요.

그들이 싫어하는 개신교의 행태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선교 활동, 단군상 파괴나 훼불 등 타종교 매도 행위, 대형화된 교회의 자본주의적·비역사적 이미지 등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저는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스스로 자정의 능력을 잃어버릴 때 외부의 힘으로 우리를 치시기도 합니다. 다만 제가 진지하게 염려하는 것은 그런 반 기독교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이 나중에 스스로의 영혼을 그르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486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The Church always needs to be reformed)는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저 주실뿐이지 은총을 팔지 않는다"고 외치면서 중세의 교권에 맞섰던 루터의 혼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1521년 4월 18일 보름스(Worms) 의회 앞에서 그의 입장을 철회하라는 교권의 명령을 받았을 때, 루터는 양심의 명령에 반하는 어떤 명령에도 복종할 수 없다며 기꺼이 파문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그때 했던 루터의 기도는 잠들어버린 우리 심령을 깨우는 우레 소리로 들립니다.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나는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ere I stand. I can not do otherwise. God help me! Amen.") 이 기도는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옵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할 때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신앙적인 야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나 싶습니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종교, 잘못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종교는 타락한 종교입니다. 저는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황금 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개혁의 요구 앞에 서있는 우리 교회의 현실을 진단해보려 합니다.


전락: 싫증난 조연

아론은 황금 송아지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말에 능치 못한 모세를 대신하여 바로와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각종 이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산 위에 앉아 기도하는 모세의 두 팔을 든든히 받쳐주기도 했습니다(출17:10). 그는 모세라는 주연을 돕는 조연이었지만, 위대한 조연이었습니다.

조연의 역할에 만족할 때 그는 위대했지만, 스스로 주연이 되려할 때 그는 조금씩 어긋나기가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그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소명을 주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32장의 사건은 그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정황은 이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우레와 번개와 짙은 구름이 드리운 산, 뇌성이 울리는 거룩한 산 위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어쩌면 산 벼랑 앞에서 서는 것보다 더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침식조차 잊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 아래의 형편은 달랐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지도자 부재의 상황이 지속되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뭔가 안전보장의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구책을 강구합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32:1)


백성들을 깨우치고, 용기를 북돋워야 할 아론조차 동요합니다. 백성들의 두려움에 전염이라도 된 것일까요? 그는 빌라도가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여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것처럼, 백성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성급하고, 열광적인 그 소리에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서서 그렇게도 당당했던 그 사람이 아닌 듯 보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신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아 오라고 지시합니다. 사람들은 금붙이와 각종 장신구를 그에게 가져옵니다. 마치 구원의 길이 거기에 있다는 듯이 그들은 그 일에 열심입니다. 마침내 아론은 금 송아지를 만들고 맙니다. 성경은 이 대목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이 말은 나중에 백성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마지못해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다는 아론의 궁색한 변명(32:24)과 대조가 됩니다. 마침내 송아지 형상이 만들어졌을 때 백성들은 스스로가 해낸 일에 도취했다. 그들은 그 형상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바야흐로 열광적인 축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저버리고, 자의적인 종교의 탄생을 경축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틀에 금붙이와 장신구를 부어 만든 종교, 바로 아론의 종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모르고, 작은 바람 앞에서 크게 흔들리는 나약한 백성에게 염증을 느끼셨습니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손을 붙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다 진멸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산 아래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구 덕분에 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모세는 산 아래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을 보고는 분노했습니다. 마침내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그들 가운데 섰을 때 백성들의 흥겨운 도취상태는 깨졌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뿌듯해 했던 황금송아지도 깨졌습니다.


아론의 종교

오늘 우리는 광야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이스라엘 역사의 부끄러운 한 부분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이 땅의 교회는 아론의 종교에 깊이 물들어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 대신 황금송아지를 중심에 놓고 춤을 추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아론의 종교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뭔가에 취해 있지 않으면 불안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항상 뭔가 일을 만듭니다. 그들은 고요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신앙은 일상적인 삶의 경험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보이는 것에 의지하려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습니다. 하지만 아론의 종교는 보지 못하는 것들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 수와 재정 규모에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크고 화려한 교회를 짓고 싶어합니다. 그러는 동안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문제나, 예수를 닮아가기 위한 경건의 연습은 도외시됩니다.

3)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땅에 속한 우리의 욕망의 그릇을 비우도록 하는 분이 아니라, 그 그릇을 크게 만들고 또 그것을 채워주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가 사람들의 장신구와 금붙이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4) 그들은 희생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희생과 헌신, 역사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 흘려야 할 피와 땀과 눈물을 싫어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은 많지만, 그 삶의 자리를 개혁하기 위해 일어서지는 않습니다.


모세, 그리스도, 루터

이런 종교는 가짜입니다. 진짜 같은 가짜입니다. 이런 신앙은 작은 타격에도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응답하지 않으셨을 때 쉽게 실망합니다. 참 신앙인은 값싼 위안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욕망이 충족되는 것보다는, 자기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이 자기편이 되기를 원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기를 소망합니다. 그의 앞에 '자아'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인은 역사에 대해서 책임적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모습에 넌더리를 내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청을 거절하신다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기록에서 지워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세에게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기도했던 예수님의 그림자를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황금송아지 앞에 열광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과 나눔, 그리고 자기 부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참 신앙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곧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새로운 마틴 루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꿀 수 없어 "나는 달리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던 사람 말입니다. 아론의 종교가 득세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백성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내놓은 모세와 같은 사람을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등 록 날 짜 2003년 10월 27일 09시 33분 3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