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4.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62:6-9
설교일시 2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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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사 62:6-9


어찌 쉬거나 잠잠할 수 있으랴

주전 6세기는 앗수르의 멸망에 이른 바벨론 제국의 발흥, 그리고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 등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이 줄을 이은 혼돈의 세기였습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약소국 유다의 운명은 발부리에 채이는 돌멩이처럼 처량했습니다. 바벨론의 압박 속에서 그들은 황폐·기근·죽음·절망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그 자식들은 "그물에 걸린 노루"(51:20) 꼴이 되었습니다. 박해자들은 이스라엘에게 "땅에 엎드려라. 우리가 디디고 지나가겠다"고 하였고, 그들의 "등을 땅바닥 밟듯 밟고 길바닥처럼 디디고"(51:23) 지나갔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때려부술 듯이 화를 내며 괴롭히던 자들이 두려워"(51:13)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습니다.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고통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의미 없는 고통처럼 사람을 황폐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이 겪는 고통이 하나님을 등졌던 삶의 결과임을 뒤늦게 자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된 셈이지요. 하지만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징벌을 당하지 않는 바벨론을 보면서 그들은 기가 막혔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없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실 능력이 없으신 것인가? 이 고난은 그저 고통일 뿐인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힘이 자기들에게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바와 비슷합니다. 무력감이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때 낙심한 사람들 한 가운데에 한 예언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의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주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와 구별하기 위해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는 역사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구원사의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즉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있고, 따라서 그들이 겪는 고통은 새로운 역사를 낳는 산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예언은 고난 속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줍니다. 그의 예언은 아픈 오늘을 살면서 어떻게 내일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비전 세우기

모두가 입을 다물고 죽음 같은 침묵에 빠져 들어갈 때 제2이사야는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시온 위에 동터오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르기까지는 쉴 수도 잠잠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의기소침한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이방나라들이 네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뭇 왕이 네가 받은 영광을 볼 것이다.(62:2)

비록 지금은 이방의 천덕꾸러기 신세이고, 유다 사회의 공의는 무너졌지만, 오늘의 고난을 통해 이스라엘의 공의가 회복될 것이고, 이방나라들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영광에 놀라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이 '의'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의'를 뜻하는 단어는 둘입니다. 하나는 미슈팟(mishpat)인데, 이것은 재판관이 각자에게 돌아갈 몫이 공정하게 배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평, 혹은 정의(justice)라고 번역하면 될 겁니다. 다른 하나는 쩨다카(tsedakah)인데 박애·친절·관용 등 억압받는 자에 대한 애타는 동정과 연결되는 것으로, 성경은 이것을 의(righteousness)라고 번역합니다. 제2이사야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는 고난은 무너진 유다 민족의 '미슈팟'과 '쩨다카'를 회복하기 위한 기회요, 디딤돌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되게 마련입니다.

고난의 현실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할 때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새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소박데기', '버림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헵시바' 즉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불릴 것입니다. 그들이 사는 땅도 '불모의 땅', '황무지'가 아니라 '쁄라’, 즉 ‘결혼한 여인’으로 불릴 것입니다. 예언자는 지금 황폐하게 변해버린 땅이 하나님과 결혼한 생명의 땅으로 바뀌는 날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꿈을 심고 있습니다.

비전 나누기
그러나 예언자의 이러한 꿈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비전을 나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길은 여러 사람이 걸을 때 생깁니다. 길 없는 곳을 길이라고 밀고 나가는 비전의 사람과 그 비전을 공유한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는 곳에 길이 열립니다. 희망과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에게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선지자 7천 명이 있었습니다. 주전 8세기의 이사야에게는 그루터기처럼 남겨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제2이사야에게도 그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언자와 더불어 꿈을 나누는 사람들, 피곤에 지쳐 잠들지 않고, 결코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 역사의 파수꾼들 말입니다. 그들은 거듭되는 시련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깨어 일어나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만 깨우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그들을 가리켜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도록 해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소명입니다. 저는 가끔 잡지나 신문에 글을 씁니다. 천성이 게을러서인지 마감에 쫓겨야 글을 쓰는 못된 버릇을 아직까지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마감이 되도록 원고를 보내지 않자, 기자가 아예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오늘 중으로 써보내겠다고 하면서 “바쁘실 텐데 돌아가시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기자는 “저 시간 많아요. 다 쓰실 때까지 기다릴께요.” 하면서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저는 그 자리에 앉아서 기자의 입회 하에 원고지를 다 메꿔야 했습니다. 그 기자의 끈덕짐이 나의 게으름을 타파한 셈이지요.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사람’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뜁니다. ‘아, 믿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쉬지 못하시도록 하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 때문입니다. 온갖 말썽을 부려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뒤치다꺼리를 하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백성을 포기하지 못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이 쉽지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러면 누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진노하신 하나님의 두 팔을 붙잡았던 모세처럼,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기어코 받아내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의가 사라진 세상에서 미련스럽게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사람, 세태에 따라 둥둥 떠내려가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잠에 빠진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며 끝끝내 그들을 포기할 수 없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가슴에서 이런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한국 사람들은 누군가와 싸울 때 유난히 목소리가 큽니다. 그건 육박전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음성을 높이는 것은 “누가 나 좀 말려줘요” 하는 신호가 아닐까요?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으면 소리는 금방 잦아들고 타협점을 찾게 마련입니다. 외람되지만 하나님도 당신의 치켜든 팔을 막아설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평화의 선물
이런 이들이 있을 때 하나님은 오른손을 들고 하신 당신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 약속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이 갈등과 불화를 극복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하는 세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꿈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저는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느긋한 하나님의 평화가 먼저 우리들의 삶 속에서,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의 나라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의 식량으로 내주지 않겠다.
다시는 네가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 사람들이 마시도록 내주지 않겠다.(8)

미슈팟과 쩨다카가 회복된 세상이야말로 사람이 살만한 세상,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하나님과 결혼한 땅이야말로 기쁨과 평화를 거두는 생명의 땅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화가 아니라 복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17:2). 인간의 죄악은 잠깐 동안 하나님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근본적인 사랑을 뒤바꿔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희망의 단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쉬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고, 무너진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안심하고 사는 평화의 세상, 노동자들이 더 이상 죽음으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힘있는 나라나 개인의 강요에 의해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대한 꿈은 우리의 꿈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꿈입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구원을 받기까지 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칼바람 부는 성벽 위에 서서 밤이나 낮이나 깨어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드리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던 이사야처럼 역사의 부름에,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3년 11월 02일 15시 27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