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5. 생의 이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10:17-24
설교일시 2003/11/9
오디오파일 031109_s.mp3 [10222 KBytes]
목록

생의 이면(裏面)
눅10:17-24
(2003/11/9)

●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世界'나 '宇宙'라는 단어는 시간과 공간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世'와 '宇'는 시간을 뜻하고 '界'나 '宙'는 공간을 뜻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4차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線이 1차원이고, 선이 모여 面을 이룬 것이 2차원이고, 면이 모여 立體를 이룬 것이 3차원이고, 여기에 시간이 더해진 것이 4차원입니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자들은 우주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숨겨진 차원(hidden dimensions)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우주를 '접혀진 우주'라고 합니다. 어쩌면 바울 사도가 다녀왔다는 3층 하늘도 그중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의식의 지평 속에도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제대로 설명할 능력이 없지만, 우리의 경험을 조금만 반추해 보면 삶의 숨겨진 차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라는 소녀가 꿈에 토끼굴에 떨어져서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며 겪는 신기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작가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런 상상력이 가능한 것은 뭔가 우리 속에 숨겨진 차원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삼국유사>> 조신몽(調信夢) 설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맺어질 수 없는 여인을 사랑하는 조신이 관음보살 앞에서 기도하다가 엎드려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여 50년을 살아가면서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고생이 너무 자심(滋甚)하여 헤어지기로 하고 막 길을 떠나려는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꿈속에서 한 평생을 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다음 날 조신의 머리카락이 허옇게 세었더랍니다. 추락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짧은 동안 자기 일생을 다 돌아보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게 다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확실히 경험하고 있는 숨겨진 차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이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것은 그곳에 어른들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차원과 통하는 문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상상은 자유니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삶은 신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집착하느라 생의 이면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이게 무엇보다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존재인데, 그렇기에 우리 삶의 여장은 늘 홀가분해야 하는 데, 우리는 생의 짐에 짓눌려 비틀거립니다. 때때로 불청객처럼 우리를 찾아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그리고 허무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어느 신학자는 '불안'이 '無'로부터 태어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불안'과 '허무감'은 '無로부터의 호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불안과 허무감이 지나치면 그건 병이지만, 그것이 창조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자신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앞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은 참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앞모습을 치장하는 일에 열심이니까요. 그런데 사람마다 앞모습과 뒷모습이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불일치의 정도가 심할수록 그는 외롭습니다. 앞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남에게 드러내고 싶은 '나'일 것이고, 뒷모습은 남에게 드러나는 '내 영혼의 풍경'일 것입니다. 우리는 앞모습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중요한 우리 영혼의 문제에는 소홀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남루합니다.

● 내가 정녕?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정말 중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귀신을 내쫓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불안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능력이 자기들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해냈습니다. 물론 자기들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실 때는 능력까지도 함께 주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을 통해 나타난 놀라운 현실 앞에 감격했습니다. 영화 <<벤허>>의 감독인 윌리엄 와일러는 영화 시사회를 마치고 나서 "오 신이시여, 정녕 제가 이 영화를 만들었단 말입니까?" 하고 스스로 감동했다지요? 제자들의 마음이 꼭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나를 통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이, 특히 생명의 회복이 나타난다는 것보다 더 가슴 벅찬 일이 있을까요? 갈등하던 사람들이 화해를 하고, 살맛을 잃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되찾는 일에 내가 어떤 역할을 했다면? 제자들은 황홀했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임무를 완수한 병사처럼 의기양양하게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 앞에 서서 '그 사람에게 나오라'고 외치자 귀신조차 복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응답은 매우 차분합니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19)

참 엄청난 약속이지요. 부러우신가요? 그런데 이것은 70인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어떤 일 앞에서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가능성을 따져보고, 내게 돌아올 부담을 계산합니다. 하지만 내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확신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멘. 물론 물리적으로야 우리는 연약하지요. 거대한 힘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왜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내는 업적의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이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을 통해 일어난 놀라운 사건에 시선을 빼앗긴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다른 곳을 보라고 하십니다.

● 하늘에 기록된 이름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입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현실입니다. 이걸 알면 우리는 세상에서의 업적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성도들의 기쁨은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외적인 결과들보다 더욱 근원적인 데서 유래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역할이 비록 미미하다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신학생을 통해 감리교신학대학생 하나가 교통사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그마한 성의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무면허 음주운전차량에 치여 보험혜택조차 받지 못한 채,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의 상태로 누워있던 그 학생은 또렷하진 않지만 이제 의식을 회복했답니다. 며칠 전 저는 뜻밖에도 그 학생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제 능력이 많이 부족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런 상태가 되어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기다려라 아들아' 하고 응답해 주시더라구요. 낫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아닌데도 굉장히 힘이 되더라구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은 어떤 치료의 약속보다도 힘이 된 것입니다. 편지 말미에 이 어린 신학도는 목사인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지금 고민되신다면 불러주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답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저는 경건하게 "아멘" 했습니다.

● 어린아이의 맑은 눈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꿰뚫어 바라보는 것은 소위 똑똑하다는 이들, 학벌 좋은 이들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맑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이들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알고, 예수를 아는 것은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의 사람들, 이기심으로 부풀어 오른 '자아'를 여읜 사람들, 그렇기에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뿐입니다. 어지럽기 그지없는 세상에 살면서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 보아야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 세상을 마음속에 그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열립니다. 이것은 앞서 활동했던 선지자들도, 세상의 임금들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 속에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씨를 심기 위해 기꺼이 나섰습니다.

우리는 현실이 어렵다고 울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지럽다고 한숨만 내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또 해야 할 일을 찾아 말없이 그 일을 시작합니다. 시작은 작지만 그 일을 이루어내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겉을 꾸미느라 분주해, 영혼이 남루해지는 것을 몰랐던 것이 지난날의 우리 삶입니다.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남보다 다소 느리더라도, 덜 소유하더라도, 주님의 속도에 맞추어 느긋하게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일어나 기뻐하며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십시오. 주님이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3년 11월 09일 18시 05분 3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