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6. 내 님의 사랑은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50:22-23
설교일시 2003/11/16
오디오파일 031116_s.mp3 [581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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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체를 앞에 두고

추수감사절 아침입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아니니 뭘 추수했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생 전체가 하나의 추수가 아니겠어요? 그래 행복하십니까? 별로 행복한 표정들이 아니시네요. 그럼 불행하신가요? 사실 행복과 불행은 객관적 조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부유한 사람도 불행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개의 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의 체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의식의 체입니다. 피해의식의 체를 택한 이들은 자기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을 체로 쳐 기쁨과 감사는 말끔히 걷어내고, 불평과 투덜거림만 소중히 갈무리합니다. 이들에게 삶은 흥겨운 축제가 아닙니다. 이런 이들은 주위에 어둠을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감사의 체를 택한 사람들은 똑같은 일상을 살면서도 불평과 불만은 걸려내고, 감사와 기쁨을 소중하게 갈무리합니다. 그들은 표정이 밝습니다.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는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입니다. 시인 정현종은 생명은 본질적으로 뭔가를 기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사람은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입니다. 우리는 홀로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주셨습니다. 감사의 체를 가진 사람의 말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4)

이 마음을 가지고 살면 좋겠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이들의 눈에도 세상은 어지럽고 암담합니다. 희망을 잃은 노동자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쫓겨날 형편에 처한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철로 위에 뛰어들고, 수능 성적을 비관한 젊은이들을 죽음을 택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감사의 체를 가진 사람들은 짙은 어둠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울면서라도 일어나 희망의 씨앗을 뿌립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그 희망의 근거입니다. 믿음의 눈을 뜨고 보면 작지만 소중한 생명의 씨앗들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눈 속에 묻혀 있긴 해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으로 피어날 씨앗들 말입니다. 이사야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사35:1-2) 했습니다. 이런 희망이 있기에 히브리인들은 곤고한 삶의 자리에서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 감사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오늘 감사의 마음을 잃고 살아가는 까닭은 어쩌면 모든 물건이 지천으로 넘쳐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풍요로움 속에는 진정한 감사가 깃들 수 없습니다. 가난해 보아야 살아있음의 고마움을 압니다. 저는 큰 수술을 받으신 박준희 성도가 병상에서 보여준 빛나는 미소를 기억합니다. 질병의 고통을 통해 살은 빠지고 기운은 줄었지만 놀랍게도 감사는 늘어났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전 독일 그린피스 의장인 볼프강 작스는 적게 벌어서 적게 쓰는 것이야말로 정말 잘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인생을 속도전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도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늘 앞만 내다볼 뿐 '지금'을 즐길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교회 대청소를 했습니다. 봉사의 마당을 열어놓으면 늘 의외의 분들이 오셔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번에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고,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주로 동참해 주셨습니다. 이희균 성도님은 양평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오셔서 젊은이 이상의 수고를 하고 가셨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물기를 닦아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그런 일이라도 할 수 있으니 고맙다고 하신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에게 먹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감사를 잃고 있다면 삶의 속도를 조정해서라도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 철 따라 풍성한 은혜

영혼의 허기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배고프면 밥을 찾듯이 영혼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는 '감사'를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들끓고 있는 내면의 소란을 잠시 그치게 하고, 눈앞에 있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눈을 뜨고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철을 따라 풍성합니다. '봄바람에 아롱대는 언덕 저편 아지랑이', '가을 바람에 떨어진 비에 젖은 작은 낙엽', '푸른 물결 흰 파도 곱게 물든 저녁노을', '새하얀 눈길 위로 남겨지는 발자국들' 어느 것 하나 말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습니다. 눈물과 한숨이 그칠 새 없습니다. 피해자의 눈길로 세상과 이웃을 보면 삶에 희망은 없습니다. 하지만 치유자의 눈길로, 씨앗을 뿌리는 자의 눈길로 세상을 보면 우리는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완제품을 주시지 않습니다. 씨앗을 주십니다. 우리가 희망을 뿌리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애니 딜러드의 말을 제 설교의 결론으로 삼고 싶습니다.

"나는 죽는 순간 드리는 기도가 '제발'이 아니라 '감사합니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떠날 때 문간에서 손님이 주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듯이 말이다."
-<<팅커 크리크에서의 순례>> 중에서

등 록 날 짜 2003년 11월 23일 13시 46분 2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