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8. 마음의 창을 열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21:34-38
설교일시 200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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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을 열라
눅21:34-38
(2003/11/30, 대강절 첫 주)

● 마음의 재계

이제 금년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실 교회력으로 보면 오늘이 새해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기로부터 한 해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스산한 초겨울 바람은 우리에게 살아온 날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과연 가야 할 곳으로 갈 가고 있는지, 아니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계절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마음의 재계(齋戒)입니다. 세상의 분답(紛沓, 사람이 많이 몰려 붐빔)을 뚫고 걷느라, 더러워진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줄여야 합니다. 며칠 전 우리가 잘 아는 법정 스님이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회를 주장하는 법사)를 그만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침묵의 가치를 그렇게 강조해 온 자신이 너무나 많은 말을 하며 살았음을 자각했다면서, 이제는 말을 좀 덜하고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권이 참 시끄럽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 마음도 덩달아 시끄럽고 편치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편을 가르고, 누군가를 비판하고, 미워하는 마음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제는 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쓰라린 역사의 기억이 많은 우리인데,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참 곤란한 일입니다. 공자님은 날 때부터 아는 사람을 '生而知之'라 했는데, 이런 이들은 성인이라 하겠습니다. 배워서 아는 사람을 '學而知之'라 했는데, 자기는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큰 고생을 해야 비로소 배우는 사람을 가리켜 '困而知之'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에 속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도록 고생을 하고도 아무런 깨우침도 얻지 못하는 '困而不知'입니다. 우리가 겪어온 고난의 세월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매우 분명한 데도, 우리는 진실이나 생명이라는 가치가 아니라 특정 정파에 치우친 사고를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세상일이 제 아무리 혼란스러워 보여도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습니다. 조금씩 풀뿌리 민주주의의 모체인 시민사회가 성숙해가고 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실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아낌없이 나눔을 실천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며칠 전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경북대의 명예교수이신 김동신 박사가 자신의 퇴직금과 연금 그리고 사재를 털어 집을 짓고는, 남편 없이 자녀를 키우는 모자 가정 20세대를 무료로 입주시켰대요.. 박원순 변호사가 만든 '아름다운 재단'은 올해 모금액이 벌써 100억원을 넘었다지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희망의 불꽃을 만들어내고, 희망의 등잔에 기름을 채우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시민단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말론적인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종말론 하면 고개부터 젓고 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광신적인 시한부 종말론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종말론적인 비전까지 버리면 안 됩니다. 종말론적 비전이 없는 삶은 맥 빠진 삶이 되게 마련입니다. '종말론'은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종말의 때 앞에서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종말론의 핵심이란 말입니다. 역사의 종말만이 아니라, 개인의 종말인 죽음을 의식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이제 당신 생명이 두 달쯤 남았다는 진단결과를 통고 받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통고를 받고 난 후에도 동녘에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서산에 물드는 노을을, 떨어지는 낙엽을, 흩날리는 눈발을, 까르르 웃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을까요? 늘 얼굴을 마주 하고 살아가는 가족들과 이웃들, 동료들을 아무 생각 없이 대면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종말론적 삶이란 오늘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종말의 날을 내다보면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 미혹되지 말라

그 첫째가 '미혹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구원자를 자처하는 수많은 가치들과 존재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말에는 잘 속지 않지만, 우리는 이런 저런 메시야를 추종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학벌, 출세, 돈을 우리의 구원자로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면 우리는 죄에 팔린 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방탕함'과 '술취함', 그리고 '생활의 염려'를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우리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마음이 둔해지면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삼라만상을 통해 우리에게 말 건네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인데, 영의 숨결이 그치고 나면 남는 것은 동물적인 욕망뿐입니다.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의 날은 덫과 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 선인들은 마음의 순일함을 유지하기 위해 허리에 방울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앉고 일어설 때마다 울리는 방울 소리를 듣고 흩어졌던 마음과 정신을 새로이 가다듬었습니다. 그 방울을 가리켜 '성성자'(惺惺子)라고 하는데, 이때 '성'은 심방 변에 별 성자가 결합된 '깨달을 성'입니다. 글자 모양으로 보면 마치 마음에 별이 떠오른 것 같습니다. 성성자는 그러니까 깨달음의 방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해 종작없이 흩어지려 할 때마다 방울 소리는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부르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에게도 그 비슷한 게 있기는 한데, 역할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뭔지 아시겠어요? 휴대전화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휴대전화, 이것은 우리 마음을 본래적인 데로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 다른 데로 부르는 것 같습니다.


●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근심할 일이 없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근심하지 말랍니다. 어떻게 근심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인생은 어쩌면 끝없는 난관의 미로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지 근심의 선수들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미래의 근심까지도 가불해서 살아갑니다. 기쁨과 감사의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근심이 영토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지 않은 미래는 하나님께 맡기고 편안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은총을 주시면 우리는 오늘의 짐을 지고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일의 짐까지 질 수는 없습니다. 근심의 가불 때문에 우리는 지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6:34)

옛말에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는다'(仁者無憂)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의 터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편안합니다. <<빙점>>의 작가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는 암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근심을 여읜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의 태평한 모습을 봅니다. 호수 한복판에서 큰 풍랑을 만나 제자들이 울부짖고 있는 현장에서도 태평하게 잠들어 계신 예수님의 모습, 십자가에 달리신 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시던 예수님께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라고 기도하시던 모습이 그것입니다.


● 말씀과 동행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지혜를 전해주시고는 아침이면 성전에 나와 말씀을 가르치셨고, 저녁이면 감람산으로 물러나 쉬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갔습니다. 참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아침 일찍 성전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은 참 복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샌가 새벽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밤의 문화에 익숙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해지려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리듬을 찾아야 합니다. 아침이면 일하고, 저녁이면 물러나 쉬는 삶의 리듬 말입니다. 어떤 사람의 하루를 보면 그 사람의 일생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마치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과 같습니다. 화가가 찍는 점 하나의 의미는 당장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그 점들이 모여 뭔가 형상을 빚어냅니다. 이처럼 인생은 하루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의 아침 시간이 결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 시간을 구별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영적 호흡을 가다듬는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듬뿍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시작하면 그 동안 우리를 괴롭히던 생의 문제는 상당 부분 지배권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생의 본질적인 문제와 마주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해보십시오. 30일 동안 왕 이외에는 어느 신에게도 기도하지 말라는 다리오 왕의 칙령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기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단6:1).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서도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침 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루를 주님께 봉헌하면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헛될 수 없습니다. 실패와 고통조차도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아름다운 광채로 빛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기다림의 절기에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주님이 들어오시기를 빕니다. 어두운 하늘에 떠오르는 새벽 별과 같은 주님의 맑음이 우리 마음에도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3년 11월 30일 13시 35분 0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