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49. 낙관주의의 뿌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빌1:3-11
설교일시 200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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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주의의 뿌리
빌1:3-11
(2003/12/7)

● '하나'를 잡은 사람

세상에 와서 자기의 생을 걸만한 일을 찾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소설가는 자기는 소설로 생에 복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을 복무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저는 그의 진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 쓰기는 그의 구도행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생에 복무하고 계십니까? 다른 것은 다 잃어도 그것 하나만 이루면 여한이 없는 일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들 합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옥중에서도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최고의 보물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값진 진주 하나를 사는 상인처럼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샀습니다. 질그릇 같은 몸 안에 그리스도를 모신 즐거움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공자는 朝聞道면 夕死라도 可矣니라(<<論語>>, 里仁, 八章)하고 말했습니다. 사물의 마땅한 이치를 깨달아 아는 사람은 이치에 닿게 살 것이고, 죽으면 편안해서 여한이 없다는 뜻일 겁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궁극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1)

그는 이미 살고 죽는 것을 넘어선 사람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데, 이미 죽음을 넘어선 사람을 누가 불행하게 만들 수 있겠으며, 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일찍이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요10:18)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림으로 영원한 생명에 속했음을 확신하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일희일비를 거듭한다면 아직 예수라는 생명의 중심을 붙잡지 못한 것입니다. 무한하신 분의 놀라운 역사(役事)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실패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자기를 온전히 맡기고 살아간 사람은 누구도 자기 인생이 실패작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넉넉한 돈도 아니고, 출세도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얻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얻었기에 밝은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기쁨의 샘이 된 사람들

바울의 또 다른 기쁨은 빌립보 교인들과의 영적인 사귐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홀로 있으나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정성과 사랑이 그를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이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의 몸이기는 하였지만, 그는 잊혀진 존재도 아니었고 버림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둡고 음습한 감옥을 마치 생명의 꽃방석인양 기쁨의 자리로 만든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 가운데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의 모습을 하나 하나 떠올렸을 것입니다. 복음을 최초로 받아들이고 자기 집에 머물기를 강권했던 루디아,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가 바울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은 소녀, 빌립보 옥중에서 만나 신자가 된 간수,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신자들을 떠올리면서 바울은 행복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든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한 그들은 기쁨의 샘이 되어 바울의 가슴까지 흘러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6)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확신이 바울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들 속에서 착한 일, 곧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 사람일뿐입니다.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그 일을 마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안달복달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심고, 물주는 일을 할 수 있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이런 기대를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기쁨의 샘이 되어 솟구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군가의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사랑과 평화의 샘물이 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 그리움

바울이 경험하는 기쁨의 또 다른 근원은 그가 성도들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애태움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에는 아픔도 따릅니다. 하지만 사랑은 아픔보다 더 큰 기쁨을 줍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7).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8). 아주 절절한 사랑고백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합니다. 이런 심정의 동일시를 통해 바울은 오히려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깊디깊은 사랑을 절감합니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움의 대상을 잃어버리면 우리 삶은 사막처럼 쓸쓸해집니다. 그리움 하면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이 떠오릅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그립다 말을 하면 더욱 그리워지고, 모른 척 해볼까 해도 저절로 눈길이 머물고, 석양 무렵 산에 들에 들고 나는 까마귀들은 그리운 마음을 더욱 애타게 하고, 무심히 여울여울 흘러가는 강물은 어서 가자고 재촉합니다. 세상의 무엇을 보아도 다 그리운 님이 떠오릅니다. 이게 그리움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랑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이 어찌 불행하다 하겠습니까? 또 이런 사랑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들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이 확신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살 수 없습니다.

● 영적 성숙을 위한 기도

바울은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빌립보 교인들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도 드립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안위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그들의 믿음이 깊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욱 풍성해져서 선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그들의 품성이 새롭게 되어 진실할 뿐 아니라 허물없이 깨끗한 사람이 되기를,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를, 그래서 마침내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성숙은 우리가 뭔가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확고히 머물 때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4)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주님의 마음에 잇대어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는 가시적인 결과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해도,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가장 강력한 지원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도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절감합니다. 이 아름다운 기다림의 절기에 우리는 우리 신앙 공동체와 성도들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 조용히, 감사함으로,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셨던 것 같은 영적인 평화와 기쁨을 우리에게도 허락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3년 12월 07일 13시 33분 4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