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0. 말씀에 맛들이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119:129-136
설교일시 200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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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맛들이라
시119:129-136
(2003/12/14, 성서주일)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숨진 어머니와 6개월을 동거한 사건이 우리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경험했을 마음의 쓸쓸함과 황량함이 큰 아픔이 되어 다가옵니다. 46살 된 중국동포 김원섭씨가 서울 거리에서 얼어죽었습니다. 공사장의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불법 체류자로 몰려 숨어지내다가 밀린 임금을 받으러 나갔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지난 9일 새벽 1시경부터 4시 25분까지 119와 112에 열 두 차례나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종로4가에서 창덕궁 쪽으로 가고 있는데 추워 죽겠고 힘이 없어서 못 걷겠습니다. 사는 데가 기독교 100주년기념관 쪽이니 순찰차를 보내주십시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매우 의례적입니다.
"집도 가까우니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세요."

하루에도 그런 전화를 여러 통 받을 근무자들의 처지를 모르진 않지만 왠지 아쉽습니다. 이번 일은 우리의 양심에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절실한 신음소리가 우리의 귓바퀴를 맴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우리는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에 공모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난자의 구조요청에 응답하지 않는 도시!! 만삭의 임산부가 머물 곳이 없어서 마굿간으로 향했다는 첫 번째 성탄절의 이야기는 관념도 아니고 신화도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 주파수를 변경하라

주전 8세기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아모스는 자기 시대를 가리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 기근이 들린 시대"(암8:11)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의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의례도 매우 화려하게 거행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그 시대가 위기의 시대임을 직감했습니다. 부자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할 길이 없어서 종이 되는 판이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고관들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아모스는 그 시대를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하는 시대'라는 한 말씀으로 규정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침묵하는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어폐가 있네요. 하나님은 언제나 자연을 통해서 혹은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또 눈밝고 귀밝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에까지 가닿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의 욕정과 염려에 주파수를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파수를 바꿔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살길입니다. 얼마 전 남극 세종기지에서 실종되었던 대원들이 구조될 수 있었던 것은, 남극에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든 나라 기지국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던 채널 16으로 주파수를 맞추었기 때문이라지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 삶을 조율해 나가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하고, 치유하고, 북돋고, 깨우치고, 지탱하고, 이끄십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빛이 나왔고 해와 달과 별이 나왔고 땅에서 움돋는 각종 나무들이 나왔습니다. 출애굽 사건도 '내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건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만난 사람은 이전의 그 사람일 수 없습니다. 물론 이때의 만남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겨지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만난 사람은 생기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너는 내 것이라." 칭찬 한 마디를 들어도 살맛이 나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옥에 갇힌 춘향이를 찾아가는 이몽룡의 몰골은 초라하지만, 그는 당당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암행어사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한 우리는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둔한 우리 속에 빛을 가져온다(130절)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길을 읽으면 지도를 참조하듯이,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조용히 멈춰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 속의 어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 생은 밝아집니다. 밝음은 배움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경외함으로 얻는 것입니다. 살아있음이 그저 고맙고, 함께 지내는 이들이 그저 반갑고, 바라보는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맛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밝습니다. 저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과 만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며칠 전 근 20년만에 존경하는 선배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미국에 머물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친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주변을 돌보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버림받은 노인들을 당신 집에 모시고, 친부모 이상의 정성으로 돌봐드렸습니다. 돌아가신 변선환 목사님께서 언젠가 미국에 다녀오신 후에 "아무개가 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나는 정말 그가 예수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표정에서 '참 사람', '산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의 태도는 겸손했고 표정은 매우 부드러웠지만, 저는 그의 모습에서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를 보았습니다.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133절). 시인의 기도는 그 선배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앞에 서면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그의 백성에게 준엄한 경고를 보내셨습니다(렘23:33-40). 하나님은 "부담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the burden of Yahweh)이 있느냐"는 백성들의 물음을 문제삼고 계십니다. 여기서 '부담'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맛사'는 '짐'이라는 뜻도 있지만 '말씀'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절묘한 말장난이지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위로의 말씀은 좋아하지만 책망의 말씀은 싫어합니다. 말씀을 부담스러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나는 너희가 부담스럽다"(You are my burden!).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듣기 좋은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다보면 영혼이 성장을 멈춘다는 것입니다. 성장이라는 게 뭡니까? 옛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겠지요? 브라질의 대주교였던 돔 헬더 까마라의 말을 들어보세요.

"우리는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보처럼 순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비폭력적으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쉽게 찾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장미꽃잎 위를 걷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때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정의와 평화의 순례자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사막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의 순례자가 되려는 사람은 장미꽃 다발이 아니라 사막을 기대해야 한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려면 자기가 깨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자기가 깨져야 큰 사람이 됩니다.

● 말씀의 실현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을 건네오십니다.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우리가 늘 겪고 있는 일상의 사건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 귀가 어두워 잘 듣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과 역사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들을 줄 아는 사람을 저는 철든(?) 신앙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완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이야말로 우리를 하늘로 이끄는 길입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주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품에 전폭적으로 우리를 맡길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하루 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격이 건강해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맛들여야 합니다. 홍탁이라고 하던가요? 홍어 삭힌 것 말이에요. 처음 먹어본 사람은 그걸 먹고 기절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하지만 일단 맛을 들인 사람은 홍탁 예찬론자가 되더군요. 하나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시작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에 맛들인 사람은 자기 내면이 점점 넓어지고, 평화로워지고, 든든해지는 것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홀로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보면 그 미묘한 말씀이 우리 가슴의 말씀이 되어, 우리 속에서 생동하는 기운이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 읽기의 완성이 뭘까요? 깨달은 만큼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면 그 말씀은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맙니다. 사냥꾼이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가는 것은 재미 삼아 하는 것도 아니고, 발자국을 연구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짐승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까닭은 그분과 만나 우리 삶이 새로워지기를 원해서입니다.

겨울은 성경을 읽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옛 사람은 "경서를 읽기는 겨울이 좋다. 그 정신이 전일한 까닭"(讀經宜冬, 其神專也)이라고 했습니다. 이공(李空)이라는 어른은 혼자 성경을 읽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성경을 읽을 때면 문밖의 사람들은 안에 다른 누가 있는 줄 알았답니다. "아하, 그렇군요." "예, 그러셨던 거군요." "알겠습니다." 이공 선생은 하나님과 마주 앉아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연말이 되어서 사람들의 마음이 분주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다보면 마음의 창고는 텅 비게 마련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가슴에 안고 있었기에 역사의 격랑을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생동할 때 우리는 인생의 어떤 재료를 가지고도 아름다운 생의 천을 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이웃들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맛들이고, 그 말씀의 신명에 지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평화의 일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3년 12월 14일 13시 59분 5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