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2. 주님 덕택입니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36:1-9
설교일시 200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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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덕택입니다
시36:1-9
(2003/12/28)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올 한 해 어떠셨습니까?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가 우왕좌왕右往左往이었다지요? 본래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역사니까, 크게 염려하지는 않습니다만, 시간 여행을 하며 경험한 어지럼증은 여전히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정치권의 모습은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고, 경제적인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조류독감과 광우병 파동으로 축산농가가 울상을 짓고 있습니다. 이란에서는 대지진으로 수만 명의 생령들이 건물의 폐허 속에 묻혔습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찢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갖 고통과 추함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이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누구도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채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은 물음표처럼 보입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겪어왔던 모든 일의 의미를 깨닫고, 느낌표로 서게 될 것입니다. 비록 고통스럽다 해도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희망입니다. 어찌 보느냐에 따라 삶은 사뭇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 똑같은 새를 보며

하늘을 자유롭게 날며 재잘재잘 노래하는 새를 보면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 지닌 새도/그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나오는 부리로/필사적으로 벌레를 잡아먹는다/고고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날아가는 새들도/물가에 내려 비린 물고기를 잡아먹거나/진흙탕에 발을 딛고/날개와 깃털에 온통 흙물 묻힌 채/먹을 것을 찾는다" 뭔가 좀 슬프고 구차한 느낌이 들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친 털에 징그럽게 꿈틀거리는/벌레를 잡아먹어가면서도/저 새는 저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구나/온몸에 흙탕칠을 하며 먹을 것을 구하던/새들도 저리 환하게 날개를 펼쳐들고/하늘 한가운데 다시 날아가는구나/제 하늘 제 소리를/저렇게 지켜가는구나"(도종환, 「똑같은 새를 보며」) 어때요? 뭔가 마음이 좀 환해지지 않나요? 행복은 어쩌면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힘겨웠어도 그래도 믿음을 지키면서 여기까지 왔으니 감사해야지요. 이라크 전쟁, 정치인들의 끝없는 정쟁, 불황에 가까운 경제상황, 날로 외설적으로 변해 가는 문화…. 어둡게 바라보자면 한없이 어둡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두고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때가 되면 꽃들은 피어납니다. 절망의 심연에서도 희망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모처럼 만난 사람에게 "잘 지내시지요?" 하고 물으면 대개는 "덕분에 잘 지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무의식적인 언어습관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잘 지내는 것은 누군가의 덕분이라는 생각이 우리말속에 담겨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은 우리 모두가 "주님 덕택에 제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閭巷의 풍경

물론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빛보다 어둠이 더 지극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시인도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들이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빛이 아니라, 여론의 동향입니다. 그들은 눈빛이 지나치게 의기양양해서 힘없는 이들을 주눅들게 만듭니다. 제 잘못을 찾아내 버릴 생각은 없고, 남의 허물을 들추기에 분주합니다. 올해 우리가 자주 들은 단어 가운데 하나가 '석고대죄席藁待罪'(거적을 깔고 엎디어 처벌을 기다림)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석고대죄하는 이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시인은 그런 악인들을 가리켜 '사기와 속임'의 명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악한 궁리를 하다가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입니다.

이제나 그제나 어쩌면 이렇게 사람 사는 꼴이 비슷한지 모르겠어요. 이 시가 3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보편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에덴의 동편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평안은 없습니다. 불안과 고통, 슬픔은 우리의 삶에서 분리해낼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물론 악인들이 판치는 세상만 바라보면 속이 상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격으로, 자꾸 추한 현실만 바라보면 우리 영혼의 정원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세상은 늘 그럴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악의 뿌리를 뽑을 수는 없습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자라는 것을 허용하셨겠습니까? 하지만 때가 오면 밀과 가라지는 분리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행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역사를 궁극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한 가지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작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의지만 있다면 세상을 바꾸고 교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그저 저 자신만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너무 작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아르스의 성자인 비안네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할 때 "그 사람들이 나를 잘 알고 있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근거 없는 비난이라고 길길이 뛰지도 않고, 변명을 길게 늘어놓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기를 돌아볼 뿐입니다.

●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시인이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그가 더 크고 깊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은 5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 이것이 우리의 생의 바탕입니다. 주님의 미쁘심은 온 세상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믿어지십니까? 느껴지십니까? 누더기를 입고 살든, 비단옷을 입고 살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의 희망의 이유입니다.

또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습니다. 산에 들 때마다 산의 품이 참 넉넉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을 품어주는 산, 그리고 언제나 그 자리에 든든히 서있는 산,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교회 청년 하나가 대학원 논문을 통과하지 못해 매우 속상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울화를 삭히려고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괜히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문득 더 멀리 서있는 북한산이 자기에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수만 년을 서 있다". 내면에 들려온 그 한마디가 청년을 해방시켰습니다. 마음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걷히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경험하는 작은 실패들에 연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람한 산줄기처럼 우뚝한 하나님의 품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이 안 풀린다고 안달하지도 않고, 일이 잘됐다고 기뻐 날뛰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큰 바다와 같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시인은 바다에 빗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가요? 잘 믿어지지 않지요?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만,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서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큰 바다와 같다고 말합니다. 저는 죽음 앞에서 사람은 다 평등하다는 상투적인 말로 이 말씀을 해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큰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세상의 공평함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성취될 것이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책임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몫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 있으면 발벗고 나서서 돕고, 억울한 일 당한 이들이 있거든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일이기도 합니다.

● 주의 빛으로 빛을 보라

한 해를 보내면서 저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굴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그렇게 맑은 미소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환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맑고 깨끗한 웃음은 우리 영혼의 우울을 떨쳐버리게 합니다. 오늘의 시인은 어쩌면 제가 보고 싶은 환한 미소를 가진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께 희망을 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집에서 배불리 먹고,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십니다. 그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내다봅니다. 소망의 불빛이 가물거립니까? 주님의 빛을 받으십시오. 그분과 동행하십시오. 며칠 전 어느 교우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중의 한 대목입니다.

"시편 말씀을 버스에서도 전철에서도 외우고, 찬송도 외우다 보면 어느 덧 교회 앞에 도착한답니다. 지루한지 몰라요. 꺼져가는 심지에 기름 넣으면 불이 금세 새 빛을 내죠. 제가 그래요. 혼자 지내는 날이 많다 보니 주일 아침이 그렇게 기다려지고 앉는 그 자리가 눈에 선하고, 그 자리에 앉고 싶지요. 교우들 만나면 그렇게도 반갑고요 정말 잔치 장소에 온 기분이죠. 목사님, 내가 지금 예수 믿고 교회 생활하는 그 이상의 감사와 기쁨이 또 없어요. 항시 한가로울 때 생각해보면 정말 예수 믿고, 주님의 교회의 지체됨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요. 해가 바뀌면 바뀔수록 짙어져요."

해가 갈수록 세상은 살기 어렵다지만, 주님 안에 있는 이들 속에서는 기쁨과 감사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 희망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03년 12월 28일 13시 51분 1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