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3. 사랑과 진실로 길을 삼으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잠3:1-8
설교일시 200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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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진실로 길을 삼으라
잠3:1-8
(2003년 송구영신예배)


차 한 대가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모든 것이 뭉크나 달리의 그림처럼 흐느적거립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불빛들이 영롱하게 흔들리고, 아파트 건물은 춤을 추는 것처럼 너울거립니다. 계단도 휘청거리고, 현관문에 붙은 304호라는 숫자도 물결처럼 출렁입니다. 문을 열어주는 아내의 모습도 몽환적으로 보입니다. 이윽고 한 사람이 침대 위에 무거운 짐을 부리듯 철퍼덕 쓰러집니다.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온 중년의 가장, 그의 눈자위가 벌겋습니다. 한숨을 토해내듯 그가 혼잣소리를 합니다. "ㅆ…ㅂ…살아 남았다. 2003년!" 홍승우 화백이 한겨레신문에 그리는 비빔툰이라는 만화입니다(12월 30일자). 그 만화를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눈물겹게 한 해를 살았나 실감했습니다.

● 여든 다섯 번째 날
하루가 지나 아침해가 밝아온다고 우리의 삶의 조건이 달라질 리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새해를 살렘으로 맞이합니다. 뭔가 지금보다는 나으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희망은 허황할 때가 많지만, 희망조차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설렘조차 없이 새해를 맞을 수는 없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겠기에 말입니다. 지난 해는 정말 힘에 겨웠습니다.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멕시코만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떠올랐습니다. 성실하고 사려 깊은 늙은 어부는 여러 날이 되도록 단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멕시코 만류에 조각배를 띄웠습니다. 마침내 85일째 되던 날 그는 무서운 격투 끝에 나룻배보다 2피트나 더 큰 자줏빛 대어 한 마리를 낚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얻기 위해 너무 멀리 갔으므로 그는 돌아오는 길에 그 대어를 상어떼에게 다 먹히고 앙상한 뼈만 가지고 되돌아옵니다. 과연 산티아고는 아무 것도 못 얻은 것일까요? 물고기를 가지고 말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못 얻은 셈입니다. 하지만 그는 값으로 환산될 수 있는 물고기보다 더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비극적일망정 삶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새해는 어쩌면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맞이했던 85일 째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85일 째 되는 날만이 아닙니다. 실패의 쓰라림을 견뎌야 했던 84일이 없었다면 85일 째 되는 날 맛보았던 짜릿한 기쁨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이 제 아무리 힘겹고 어두워도 그것은 잊혀져야 할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해준 소중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지난 한 해가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해도, 한 해 동안 우리를 이끄시고 또 동행해주신 하나님조차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우리를 치셨고, 때로는 담으로 우리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배려였습니다. 하나님은 산 같고 고개 같은 우리 생각들을 낮추게 하셨고, 굽은 길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는 어거스틴처럼 고백합니다. "내 잘한 일은 모두가 당신이 하신 일, 당신의 은혜, 잘못한 일은 모두 내 죄요, 당신의 심판"입니다. 이제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긍휼하심 앞에 우리의 묵은해를 바치고, 은총처럼 밝아올 새해를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실을 마음판에 새기라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 기대 새해에 우리가 길양식으로 삼아야 할 말씀들을 상고해보고 싶습니다. 지혜의 스승은 자기 제자에게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1)고 권고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지혜는 하나님이기도 하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질서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상식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불은 아래에서 위로 타오릅니다. 물고기는 물에 살고 새들은 공중을 날며 삽니다. 사람은 온 세상의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채 살아가도록 잘 보살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은 먹여야 하고, 지친 사람은 쉬게 해주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의 짐을 대신 져주어야 합니다. 병든 사람은 치료받을 수 있게 해야 하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벗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지진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란 사람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삼아 그들이 삶의 희망을 회복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 그분의 명령을 지키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산하거나 주저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녕 믿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지혜는 말합니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3)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삽니다. 사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건 가장 고통받는 자를 '먼저 보살피는 것'입니다.

누군가 인생을 카드놀이에 비유하여서, 사랑하고 베풀고 나누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으뜸 패를 잡은 사람들이라고 하더군요. 돈 많고, 배경 좋고, 잘 생긴 것이 으뜸 패가 아닙니다. 지혜는 사랑과 진실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우리 목에 매며 마음판에 새기라고 권고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진실의 터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지을 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 마음을 다하여 의뢰하라
지혜는 또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5-6)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의 방법과 경험 그리고 지식에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은 참고자료 정도로만 활용합니다. 그것이 우리 생각과 일치할 때는 기쁘게 따르지만, 우리 생각과 다르거나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과감히 생략해 버릴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제 새해에는 하나님의 뜻이 설사 우리 생각과 어긋난다 해도 그 뜻을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깊고 높습니다. 우리는 한 면만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신 일은 이를 악물고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그것을 뽑아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긴 사람입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이 어디로 이끄시든 믿음으로 따라갈 줄 아는 이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우러러보는 능력
지혜는 또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라"(7)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을 우리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자면 세상의 온갖 지식을 다 구비하였다 하더라도 그 바탕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거나 위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들이 망쳐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다들 공감하실 겁니다.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이기보다는,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릴 줄 아는 사람들,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경외심은 벌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경외란 우러러볼 줄 아는 능력입니다.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는 능력입니다.

잠든 아이의 맑은 얼굴에서, 병든 이웃들의 시름에 찬 얼굴에서, 피어나는 꽃들 속에서, 신음하는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사람이 곧 경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는 사람은 '악'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헛된 자만심으로 우러러보는 능력을 잃어버릴 때 우리 영혼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용동정日用動靜을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 애씁니다. 사랑과 진실을 우리 길로 삼아 살기로 작정하면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길이 되시고, 방패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시간 속에 슬쩍 한 발을 들여놓은 우리들에게 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여호수아에게 들려 주셨던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1월 02일 09시 55분 1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