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평화의 씨앗을 심는 우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5:9, 엡2:14-18
설교일시 2004/1/4
오디오파일 s040104.mp3 [7629 KBytes]
목록

평화의 씨앗을 심는 우리
마5:9, 엡2:14-18
(2004/1/4, 새해)


● 평화, 멀지만 가야 할 길

새해 첫 주일 아침입니다. 올해도 교우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우리 주님이 주시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보 표지를 한번 보세요. 표지가 바뀐 걸 이제서 알아차리는 분도 계시네요. 어떤 생각이 드세요? '깨끗하다', '단순하다', '심심하다'…. 느낌이야 각자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밑에 있는 원추형의 기호는 '씨앗'을 형상화한 것일 겁니다. 그 안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인 동시에 생명이지요? 십자가를 품고 있는 씨앗으로부터 솟아 나온 나무가 하늘을 향해 곧장 솟구치고 있네요.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지요? 십자가를 뿌리로 삼고 있는 이 나무는 아마 웬만한 가뭄에도 시들지 않을 것이고, 홍수가 나도 뿌리 뽑힌 채 땅에 드러눕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평화를 상징하는 무지개를 드리워 있습니다. 이쯤 되면 주보 표지 그림이 우리 교회의 금년도 목표인 "평화의 씨앗을 심는 우리"를 형상화한 것임을 아시겠지요? 늘 좋은 표지를 그려주시는 조항범 집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작년에 한겨레신문은 평화 특집을 다뤘습니다. 그 주제는 '평화, 멀지만 가야 할 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부터 평화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부자 나라 국민들은 영양 과잉으로 인한 성인병으로 죽어가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먹지 못해 죽어갑니다. 이라크 전쟁의 여진이 여전히 우리 삶의 기반을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든, 텔레비전을 보든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입히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입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각박한 세태만큼이나 굳어있고, 저녁에 길을 걷다보면 고기집마다 마치 울화를 털어내는 것처럼 목에 소주잔을 쏟아 붓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차를 타고 나가 보아도 많은 운전자들이 경쟁적으로 차를 몹니다. 마치 남보다 늦게 가면 인격에 손상이라도 가는 것처럼 서두릅니다. 삶이 축제가 아니라 전쟁같습니다.


● 그리스도 모시기

혹시 평화에 대한 우리의 꿈은 헛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야스퍼스(Karl Jaspers)라는 철학자는 "오늘날 절망적으로 '이 세계에 도대체 무엇이 남았는가?'라고 묻는 자가 있다면, 누구에게나 '너는 할 수 있으므로 존재한다'는 대답이 주어진다"(『인간론』중에서)고 말합니다. "너는 할 수 있으므로 존재한다."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이 이 말을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살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므로 존재합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속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갈 수 없습니다. 공자님도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했습니다. 세상을 화평케 하려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고, 가정을 잘 보살피고,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평천하'에 이르는 길은 '수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의 관계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야말로 평화의 시작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그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가십시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여쭤보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평화의 길을 일러 주실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6a)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가 음식점 종업원이라고 해서 반말을 하지도 않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고 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뭔가를 주장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데 더욱 공을 들입니다. 그는 자기의 유익보다는 다른 이들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구합니다. 이런 이들이 있는 곳에서 평화는 싹을 틔웁니다.


● 키아바의 미소

우리가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하는 까닭은 어쩌면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낯선 것, 나와 다른 것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습관 때문에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스리기 어려운 나쁜 감정들도 가지고 있지만, 내적인 평안과 힘을 가져다주는 좋은 감정들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감정에 더욱 잘 반응하느냐일 것입니다. 저는 칼 노락이 들려주는 에스키모 소년 '키아바'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키아바가 낚시를 하러 갑니다.
"얘야, 오늘은 네 새끼손가락보다 굵은 물고기를 잡도록 해라."
아빠가 말씀하셨어요.
키아바는 얼음에 구멍을 내고 낚싯줄을 드리웠어요.
아무 것도 물지 않습니다.
키아바는 멀리서 춤을 추고 있는 바다코끼리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사냥을 갔더라면 이보다는 운이 좋았을 텐데.'
갑자기 줄이 팽팽해집니다. 키아바는 줄을 당기고, 또 당겼습니다.
손가락 스무 개를 합한 것만큼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차가운 물 속에서 나왔습니다.
키아바는 우쭐해졌어요. 그런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방금 잡은 물고기가 키아바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 거예요.
키아바는 아빠를 만나러 갑니다.
'내가 이 물고기를 잘게 잘라서 먹으려고 하는데, 이 물고기는 어떻게 나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지?'
키아바의 귓가에 따뜻한 숨결이 느껴집니다.
키아바는 귀를 기울였어요. 물고기가 아주 다정하게 웃고 있었어요.
"이제 그만!"
어린 낚시꾼은 참을 수가 없었어요.
키아바는 돌아서서 얼음 구멍 쪽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물 속에 던지며 소리쳤어요.
"나는 미소 짓는 물고기는 절대 먹을 수가 없어!"
잠시 뒤, 키아바는 자신이 한 일을 뉘우쳤어요.
'곧 아빠가 오실 텐데 뭐라고 말을 하지?'
"저런, 오늘 잡은 물고기는 너무 작아서 입 속에 감추었니?"
아빠가 놀려대며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키아바는 미소 짓는 물고기 이야기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키아바는 뾰로통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굉장히 큰 곰 한 마리가 나타나서 길을 막았거든요.
키아바의 아빠는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겁을 주어 곰을 쫓으려고 하셨어요.
아빠가 무섭게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곰도 점점 더 사납게 으르렁거렸습니다.
키아바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키아바는 곰에게 다가가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곰은 머리를 숙여 키아바와 키를 맞추었습니다.
곰은 놀랐어요. 이런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이, 더구나 화가 나 있는 곰에게 미소를 짓다니…….
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서더니, 킁킁거리며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아빠는 마을에 닿자마자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내 아들은 뛰어난 낚시꾼은 아니지만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예요. 키아바가 마법으로 곰을 쫓았답니다!"
키아바는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키아바는 기분이 좋았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만하세요. 저는 오늘 미소 지은 것밖엔 한 일이 없는 걸요."
다음날, 먼 곳에서 온 사냥꾼들이 두려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폭풍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음집을 두껍게 쌓아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키아바는 돕지 않습니다. 다른 생각이 있었거든요.
키아바는 마을을 떠나 폭풍을 만나러 갔습니다.
불어오는 폭풍을 보았을 때, 키아바는 무서워서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러나 곧 두 발로 버티고 서서 폭풍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너 같은 어린애의 미소가 나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폭풍이 고함을 쳤습니다.
"안 된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요. 그래도 노력은 해 볼 수 있잖아요?"
키아바가 대답했어요.
너무나 대담한 그 말에, 폭풍은 어이가 없어서 웃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격렬하게,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키아바는 뛰어서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폭풍이 웃고 있는 동안은 바람을 불게 하는 걸 잊어버릴 거야.'
이렇게 생각하자 키아바는 기분이 좋아졌어요.
마을은 안전했어요.
키아바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편안하게 잠 속으로 빠져듭니다.
(칼 노락 글, 『키아바의 미소』미래 M&B, 2001)

동화이긴 하지만 에스키모 소년 키아바 이야기는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사나운 곰도 태풍도 키아바의 미소를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곰과 태풍을 막은 것은 아무런 두려움도 적의도 없이 폭력적인 현실 앞에 선 키아바의 무력함과 천진함입니다. 천진한 미소는 어쩌면 세상의 어떤 힘보다 강한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 앞에 아무런 무장도 없이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미워하는 이들조차 사랑으로 품어 안으심으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 가슴에 있는 날카로운 것들이 스러져, 흙처럼 보드랍게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 평화가 곧 길이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곧 길입니다"(There is no way to peace. Peace is the way). 평화롭지 못한 방법으로 평화를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을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일 뿐입니다. 패배한 이들의 한과 아픔이 새로운 분쟁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평화를 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감정대로 살지 마십시오.
남의 눈에서 티끌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들을 우리 마음 공부의 스승으로 삼으십시오.
화를 덜 내도록 노력하십시오.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게 하십시오.
나와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진 사람 존중하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배우려는 겸손함을 유지하십시오.
좋은 것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십시오.
다른 이들과 어울릴 줄 아는 존재가 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애를 쓸 때 우리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들의 하루하루가 평화의 씨앗을 심는 파종의 시간이 되어서 우리의 머리 위로 평화의 무지개가 떠오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4년 01월 04일 14시 06분 11초